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똥꽃 Oct 23. 2020

생각나는 대로 지껄임 #1

어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올 때 있었던 일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더니 옆집 앞에 쓰레기봉투에 담긴 아기 기저귀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전에  옆 집 문 앞에 놓인 반투명 봉지에 담긴 사용한 아기 기저귀를 갖다 버리고 쓰레기봉투 한 묶음을 가져다주면서, 쓰레기는 쓰레기봉투에 담고, 혹시 갖다 버리기 힘들면 그냥 밖에 두라고 했었다. 대신 버려 준다면서. '그렇다고 진짜 냄새나는 기저귀를 문 앞에 그냥 뒀나' 생각하면서도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집에 오자마자 겸사겸사 반 정도밖에 차지 않은 우리 집 쓰레기도 갖다 버리기로 했다. (나는 비위생적인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양 손에 두 집 쓰레기를 들고, 엘리 베이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위 위층 여자와 그 집 아이 두 명이 타고 있었다. 그중 유치원 나이 정도 돼 보이는 큰 애가 나에게 대뜸 영어로 인사를 했다. 아마도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다른 사람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보다 싶었다:


여자 아이: Hello!

나: Hi! How's it going?


(순간적으로 생긴 일이라, How's it going? 이 어린아이가 교과서로 배우는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아이 엄마가 "어디 가냐고 묻잖아. 대답해 봐!"라고 아이를 독촉한다. 그리고 곧 "슈퍼에 가요라고  말해 봐."라고 했다.)


나:  (아이한테) Are you going to the supermarket? 따라 해 봐: I am going to the supermarket.

아이 엄마: I am going to the supermarket 해야지

아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에게) Bye!

나: See you later!


평소에 피아노 소리와 방방 뛰는 소음으로 내 귀와 정신을 괴롭히는 위 위층과의 웃지 못할 상황극이다.


오늘은 직장에서 1/4 분기 업무를 마감하는 날이었다. 어제까지 마쳐야 하는 일을 끝내지 못한 직원이 둘이 있었는데, 야단 한 번 치지 않고 조용히 내 사무실에 불러서 하루의 말미를 주고 일을 마치게 했다. 심지어 밖에서 점심까지 사다가 대령해 주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24시간 안에 내가 착한 일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조금 불안했다. 퇴근 후에 집에 와서는 나의 착함이 초과하지 않도록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살면서 사람은 적당히 착하기도 하고 적당히 악하기도 해야 한다는 걸 많이 느낀다.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입으로는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부르짖지만 나는 정작 갈림길에 놓이면 이상주의의 손을 들어준다.


몇 년을 친하게 지내던 사람과 최근 멀어진 일이 있다. 일로 인해 처음 만났지만, 개인적으로 많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최근에 그 사람과 업무를 같이 맡게 되었는데, 그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사람을 핑계로 그녀는 탈퇴 선언을 하면서 팀워크를 완전히 망쳐 놓았다. 나는 원활한 팀워크를 위해서는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서로 협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정말 교과서적인 그런 협업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려고 한다. 그 사람은 자신이 화가 난 사람에게 '왜 화가 났는지' 설명조차 하지 않고, 그냥 팀을 떠나 버린 후, 오직 나랑만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팀을 버릴 수 없었다. 능률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도 팀의 일원이고, 그런 사람들의 실력도 향상돼야 조직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팀을 살리기 위해, 그 사람과의 우정을 포기했다. 아니면 그냥 속 좁은 사람과 더 이상 친구 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다른 팀원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잘한 것일까? 그 한 사람과의 우정을 버린 것이 나쁜 것일까? 나는 대의를 위해 개인적 욕심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여러 명이서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따돌리거나 몰아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또는 "무엇이 문제인지" 정도는 당사자에게 설명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로 만난 관계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정작 <밥그릇>이 걸린 문제에는 아무도 한치의 양보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정은 죽고 경쟁만 남는다.


사실 이 일이 있기 전에도 그 사람은 우리가 같은 직책에 지원을 한 후로 나를 더 이상 친구로 여기지 않았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자격조건이 되는 모든 사람이 지원 가능한 자리였고, 그 사람과 나 이외에도 다른 지원자가 18명은 족히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그 직책에 지원한 사실도 숨기지 않았고, 게다가 지원서 작성에 필요한 서류와 방법도 상세히 알려 주었었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둘 중에 한 명이 되길 바랬다. 내가 아니라 그녀가 됐다면 내 일처럼 기뻐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둘 다 되지 않았고 그녀는 이후로 나를 낯선 사람 대하듯 했다. 그녀는 내가 생각해 왔던 것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있어서 또 이런 일이 생겼고 나는 그녀와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기준으로 그녀를 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와 같은 직책에 지원하는 것이 불쾌할 수도 있고, 일 못하는 사람과 협업하는 것이 죽도록 싫을 수도 있다. 그것이 보편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따로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녀의 연락이 예전처럼 반갑지도 않을 것 같다. 아마도 그녀와의 우정 유효기한이 다 됐나 보다. 흔히 말하듯 세상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원수도 없나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리 보는 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