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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Dec 04. 2021

사장님, 겨울밤 아이스커피는 사양할게요

늦게 퇴근한 목요일 저녁이었다. 바쁜 일과로 아침 점심을 대충 해결했기에 저녁은 좀 근사한 걸 먹고 싶었다. 평소에 좋아하는 베트남 음식을 배달시켰다. 월남쌈처럼 말아 놓은 고이꾸온 그리고 분짜와 분팃느엉을 고수와 함께 보내달라고 했다. 대략 한 시간 후에 음식이 도착했고 플라스틱 봉투를 열어 보니 주문한 음식 이외에도 음료수가 하나 따라왔다. 아이가 커피인지 복숭아 티인지 시음을 한다고 한 모금을 채 마시기도 전에 인상을 썼다. (커피였다.) 온 가족이 배불리 먹고 따라온 커피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남편은 온커피만 마시고 아이들과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게다가 그렇잖아도 추운 겨울밤에 냉커피라니...

싱크대에 부어 버릴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보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냥 버리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 날 금요일 아침에 냉커피를 데워서 마시면 되겠다 생각하고 냉장고 안에 넣었다. 밤에 꾼 꿈 탓인지 머리가 맑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전날 밤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커피를 꺼냈더니 얼음이 녹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냄비를 꺼내서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냉커피를 부어서 끓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커피가 끓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가스불을 껐다. 스타벅스에서 남편이 사다 놓은 훈민정음 커피 잔에 커피를 옮겨 붓기 위해 냄비를 손으로 쥔 순간 으악 너무 뜨거웠다. 나는 불 위에 있던 냄비가 뜨거울 거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손에 쥔 냄비를 떨어 뜨리지 않기 위해 고통을 잠시 참고 가스레인지 위에 다시 놓고 나니 손가락 여기저기에 화상을 입었다. 그중에 특히 오른쪽 검지에 온 타격이 가장 컸다.

'화상이 심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가장 빨리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 이후 든 생각은 '응급처치를 어떻게 해야 하지?'였다. 흐르는 찬 물 밑에 오른쪽 검지를 잠시 두었다가 연고를 찾아보았다. 화상에 쓰는 연고가 보이지 않아 피부염에 쓰는 연고를 발랐다. 연고를 바른 곳이 가려웠다. 상처 입은 곳을 보고 있으면 더 아플 것 같아 밴드로 싸맸다. 그리고 당장 오른손이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아침 일과 중에 하나인 해우소 방문 후 해야 하는 페이퍼워크 (paperwork)를 미덥지 않은 왼손에게 맡겨야 하는 것부터가 난국이었다. 아, 그리고 운전은 또 어떻게 한담? 하필 그날은 3차선 맨 왼쪽으로 합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뒷 차가 경적을 울렸다. 공간이 많아 간혹 뒤차가 앞질러 가기도 하는데 굳이 경적까지 울릴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한참을 기다렸다가 한 번에 맨 좌측으로 바로 갈 길을 참을성 없는 뒤차 덕에 일찍 합류를 하고 나니 연이어 차선 변경을 해야 했다.


출근 후에 곧바로 오피스에서 화상에 바르는 연고를 얻어 발랐다. 연고를 바른 자리가 타는 듯이 아팠다. 덕분에 아침 내내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후식으로 요구르트를 먹다가 바지 한 가운 데다가 쏟았다. 정말 고루고루 하는 날이었다. 오후에는 일 마치기 전에 잡혀 있는 회의가 있는데 난감했다. 나는 그 회의에 고객의 요청으로 특별 참여하게 돼 있었는데, 화상 입은 곳이 아직도 아파서 정신이 맑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화상 입은 곳이 아팠지만 그래도 좀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겨울밤에 온 냉커피 탓일까? 그날 밤 꾼 악몽 탓일까? 느려져 가는 판단력 탓일까? 아니면 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불필요한 절약정신 탓일까?

이번 주말은 아픈 손가락을 돌보느라 조금은 우울해질 것 같다. 12월의 첫 주말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라 생각하며, 앞으로는 먹지 않는 음식, 쓰지 않는 물건 등을 과감히 버리는 결단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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