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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기업 입사했는데 세상은 그대로네

회칙 8. 본질에 집중하기

by 이일리


 정말 일해보고 싶은 직무인 데다 산업군도 IT 쪽이고, 내가 살면서 일해볼 회사 중 어쩌면 가장 규모가 큰 곳에 최종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설레던 마음은 입사하고 난 뒤로도 이어졌다. 이직 소식을 전한 사람 중 ‘그게 뭐 하는 회사인데?’라고 묻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이름을 아는 대기업에 합격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를 처음으로 느꼈다. 재밌는 점도 있었다. 누구도 내가 무슨 직무로 일하게 될지를 맞히지 못했는데 그러고도 내 설명을 듣고는 나와 찰떡같이 잘 맞는 직무라고 대답한 것이다. 지난 몇 년 간 회사를 옮겨다니며 참 여러 가지 일을 해왔구나(참 많은 ‘점’을 찍어왔구나),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나만의 중심 능력치를 만들어 일관성 있게 끌어오긴 했구나(결국엔 제법 괜찮은 ‘도형’을 그려냈구나) 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뻤던 일은 엄마의 대기업 한을 풀어드린 거였다. 첫 직장에서 퇴사하고 이직하기 위해 여기저기 서류를 넣는데 이렇다 할 소식이 없을 때, 본사 내근직에서 매장 현장직으로 옮겨가 원치도 않던 일을 해야 할 때, 회사가 망해서 월급을 못 받고 있을 때, 회사 생활 중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때마다 엄마는 ‘늘 그래. 엄마가 똑똑했음 일리가 더 잘하고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 작은 물에서 지내고 있는 거 같아. 엄마가 같이 노력해서 처음부터 대기업을 알아보는 건데…’ 라고 이야기해 왔다. 꼭 크고 좋은 회사에 가는 것만이 효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왔고 그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 몫을 충분히 잘 해내며 엄마의 든든한 자랑거리로 엄마를 기쁘게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엄마의 자책 섞인 염원을 풀어드린 느낌이랄까.


 입사 초반까지는 여전히, 마냥 기뻤다. 맡게 될 직무도 좋았고 팀원도 팀장도 좋았고 재택근무라는 환경도 좋았지만 내가 ‘이 회사’의 구성원이라니! 하는 ‘대기업 뽕’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에 조깅을 할 때도, 점심에 공원을 산책할 때도 그 기쁨이 차올랐다. 누군가가 내게 어떤 회사 다니냐고 물어볼 때 어떻게 대답할지 상상의 나래도 펼쳤다. (엥 감전당했나…?) 하지만 고작 며칠만에 도파민이 떨어졌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에게 자랑할 일이 없었고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음이 심심했다. 며칠 더 지나자 아예 허탈해졌다. 이제 끝인가? 벌써? 내 인생에서 유별나게 큰 기회이자 성공 사례인데? 대기업 뽕이 이렇게까지 짧다고? 이제 나는 어디에서 기쁨을 얻지? 회사 일에 적응해 성과를 내서 그걸로 도파민을 얻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다시 도파민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회사와 관련된 이러저러한 내용을 들춰보았지만 지난 수 년 간의 경험으로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허탈함을 달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도파민 역치를 다시 낮추는 거라는 걸. 운동과 산책을 꾸준히 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매일의 일상에 충실하며 명상 같은 나날을 보내면 차분한 마음으로 더 큰 만족감을 얻으며 살 수 있고 그게 나에게는 더 올바른 길이라는 걸.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현재의 내가 가진 것에 취해 있는 것보다는 내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을 계속해서 떠올리는 게 훨씬 좋은 일이라는 걸.


 출근 전 아침마다 5km를 천천히 달리고, 점심에는 양배추와 계란을 먹은 뒤 산책을 했다. 퇴근 후 저녁에는 짤막하게 영어 필사를 하고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그렇게 매일을 반복하던 어느날 여느때처럼 청명한 하늘과 푸른 나뭇잎 아래를 걷다가 문득 떠올렸다.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건 나구나. 나는 나를 만족시켜야 하는구나. 남에게 자랑하며 기쁨을 얻는 건 아주 찰나의 시간이구나. 그리고 이 심심함과 허무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어린 사람 앉혀놓고 쓸데없는 자기 자랑만 하는 사람이 되는 거구나. 아주 무섭게도.


 종종 주변 사람에게 로또 1등에 당첨되면, 혹은 일해서 돈을 벌지 않아도 될 만큼 돈이 많아지면 뭘 하고 살겠냐고 물어본다. 누구는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살 거라 하고, 누구는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따라 다니겠다고 한다. 누구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한 재단을 세우거나 봉사활동을 하며 살겠다고도 한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된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런 것들이 각자가 원하는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해야 하는’, ‘되어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그런 삶.


 내가 던진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명확히 가지고 있는 답이 없다. 로또 1등에 당첨되지도 않았고, 계속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지금 상황에서도 딱히 뭔가를 아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따지자면 나는 지금의 내 삶에 제법 만족하고 있는 것일 테다. 다만 두 가지 조건은 언제나 유효하다. 첫째, 내 정신 건강을 지켜주는 루틴을 지키며 살기. 이를테면 조깅이나 산책, 양질의 수면시간 확보 같은 것. 그게 무너지면 스스로를 자꾸 가치 없는 생활을 하는 ‘무가치 생활자’로 여기게 되므로. 둘째,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도 좋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좋다. 프로-자책러였던 내가 다른 사람의 사례를 흡수하고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프로-자책방지러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나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나갔으면 좋겠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대기업에 입사하면, 로또에 당첨되면……. 수없이 많은 가정이 있지만 외부 조건이 바뀌는 것만으로 내 세상이 한순간에 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물론 더 좋은 환경에서라면 경험의 값어치가 올라갈 것이다. 배우거나 알게 되는 게 많아질 것이다. 그러면서 내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환경은 속력을 내는 것을 도와줄 뿐, 방향을 정해주지는 않는다. 내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고 행동하는지가 결국 나를 만든다. 내가 원하는 내가 뭔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 결국 나를 바꾼 건 회사나 환경이 아니라, 내가 어떤 기준으로 살겠다고 마음먹고 행동에 옮긴 순간들이었다.



회칙 8. 본질에 집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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