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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림 Jun 27. 2022

통제


  나는 지금껏 나 자신을 제법 잘 통제해 왔다고 여겼다. 매 순간 계획을 세울 정도로 치밀하고 꼼꼼하진 않지만 그래도 굵직굵직한 계획을 세웠을 때 가능하면 그대로 진행을 해 왔고, 제 때에 이루어낸 결실들도 적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먹는 것, 입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또한 무리 없이 잘 해내곤 했다. 언젠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고, 입고 싶은 것을 큰 고민 없이 사들이고,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고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인간관계에서만큼은 내 뜻과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며 내 주특기인 ‘기다리는 일’에 집중하곤 했다. 턱 밑까지 쌓인 일거리들이 잡 생각에 빠질 시간들을 알뜰히 빼앗아 가준 덕분에 나는 슬픔이나 우울 따위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도 잘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일거리를 얻으며 환기되곤 했다. 그러니 나에게 통제하는 일이란 어쩌면 기다리는 일과 마찬가지였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요즘은 나 자신을 통제하기가 이다지도 어려운 것이었는지 새삼 반문하게 된다. 특히나 아이의 치료와 교육에 집중하고 있는 요즘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리고 바로 줄행랑을 치고 싶은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찾아온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뭐 그닥 거창하게 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이가 매우 산만하고 표준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게 매일 매일,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찾아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오늘의 시작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책들과 장난감이었다. 아이는 늘 책을 빙자한 낙서 종이들을 끊임없이 양산해내고 레고 블럭들을 방바닥 가득 펼쳐놓는다. 아침을 먹은 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그런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것들을 열심히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할 설거지거리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건조 시간이 끝났다는 세탁기의 알림이 울리는 중이었다. 세탁기 안에서 몸을 구긴 옷가지들을 바로 꺼내 개어야 했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잠시 동안만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침에 일어나 5시간이 지나는 동안 청소기를 4번이나 돌렸던 집이지만 걸어 다닐 때마다 발에 무언가 계속 밟혔기 때문이다. 

  “아얏!” 

  무심코 내딛은 발에 뾰족한 것이 콕 박혀 오는 통증을 느꼈다. 발바닥엔 아이가 갖고 놀던 블럭에 파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듯 잔뜩 찡그린 얼굴로 남편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과는 조금도 상관 없다는 듯이 헤드셋을 낀 채 유튜브 영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어지러운 중심에 내가 있었다. 집안은 온통 아이가 어지른 물건들과 그 속에서 홀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나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약으로는 지금껏 보여 왔던 산만함이 나아지지 않았던 것 같네요.” 

  2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아이와 ‘상담’을 한 의사는 내게 결론을 내리듯 이렇게 말했다. 약이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면 그럼 그 다음은 무엇일까? 그동안 각종 놀이치료와 인지치료를 시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라이딩을 하며 아이를 여기저기 끌고 다녔던 나는 그 치료과정에 서서히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수학이나 영어 성적처럼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결과 따위는 없고, 그저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만 움켜쥐고 버텨야 하는 시간이었다. 비슷비슷한 매일을 보내면서도 그래도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약’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약을 먹고 나아진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치료보다도 ‘약’은 더욱 확실한 효과를 보장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아이도 그 ‘약’을 먹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조금은 ‘평범’의 구간으로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믿어 왔던 거였다. 그런데 오늘 들었던 의사의 말은 나를 평범한 일상과는 아주 먼 곳으로 밀어내 주었다. 땅 밑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과 함께. 

  그래서일까. 나는 방금 내 발바닥을 강하게 찌른 뾰족한 모양의 블럭에 참지 못하는 지경까지 오고야 말았다. 널브러진 아이의 물건들을 치우고, 치우고 나면 다시 또 널브러져 있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야 하는 일련의 상황들이 앞으로의 내 미래 같아서, 끝도 없이 반복되는 힘겨운 일상 같아서 숨이 막혔다. 나는 끝내 서 있던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아악!” 세게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과 그들을 통제하는 것에 완벽히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발은 여기 묶여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쉼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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