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천천히 엄마가 되고 있다
친정 엄마는 자칭 타칭 모성애가 강한 여성이다. 대개의 전업 주부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느라 개인의 일상이 거의 없었고, 주로 아이들의 스케줄에 맞춰 생활해 왔다. 주변 지인들도 아이들의 친구 엄마이거나 같은 동네에서 교육 관련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와 동생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우리를 부지런히 깨워 등짝을 두들겨 가며 아침 밥을 꼬박꼬박 먹여 보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우리가 하교 후 먹을 간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오전 시간을 보냈다. 나와 동생이 초등학교 6학년, 그러니까 열세 살이 될 때까지는 매년 돌아오는 생일마다 수수 팥단지를 손수 빚었는데, 그래야 우리의 삶에 액운 따위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 행위는 내 아들이 9세가 된 지금까지도 이어져 엄마는 여전히 아이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수수 팥단지를 만들고 기도를 올린다.
내가 1살 무렵이었을 땐 병원을 안방처럼 드나들 정도로 몸이 약했는데 하다하다 ‘우는 병’이라는 희안한 명칭의 병까지 걸린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아이가 내내 우는 것이 증상이었고 울지 않으면 죽었다는 뜻이랬다. 어떤 아줌마가 갓난쟁이인 나를 안고서 ‘아이고, 귀여운 것!’이라며 얼른답시고 흔들었는데, 그때 내가 너무 놀란 나머지 경기 비슷한 것을 일으킨 것이었다. 나는 병원에 데려가기 전까지 하루 밤을 꼬박 쉬지 않고 울어댔고, 엄마는 한숨도 못 잔 채로 울고 있는 갓난쟁이를 안고 병원에 갔다. 내 울음소리 때문에 집을 나서면서부터 병원에 들어선 후까지도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내 병은 아이의 울음이 멈췄는지, 멈췄을 때 숨은 쉬는지 내내 들여다 봐야 했기 때문에 엄마는 잠을 포기했다. 양약으로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나는 결국 한의원에서 손바닥을 째고 하얀 덩어리 같은 것을 대량으로 뽑아낸 뒤에야 울음을 멈추었다. 지금도 내 손바닥엔 그때의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나는 아이가 옆에서 조금만 칭얼거려도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하는데, 목청껏 울어제끼는 아이의 소리를 며칠씩이나 견뎌내며 잠도 자지 못했을 엄마를 생각하면 여자의 모성애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에겐 그만큼의 모성애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고야 만다.
어릴 때부터 여자에게는 당연히 ‘모성애’라는 것이 장착되어 있는 줄 알고 자란다. 그것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었던 나는 과연 내 안에 있는 ‘모성애’라는 것이 대체 얼마만큼의 크기를 갖고 있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친구들이 하나 둘 아이를 낳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때마다 그 아이들의 선물을 사 들고 찾아가 함께 놀아주고, 대신 씻겨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재워주기도 했지만 고작 그것만으로 내가 모성애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이를 돌봐야 하는 긴긴 시간 동안 내가 함께한 것은 길어야 3-4시간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나의 그 무엇도 희생하지 않았고, 나의 전부를 내어줄 마음 가짐도 없었으니까 모성애와는 다른 종류의 애정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선생님들은 흔히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가리켜 ‘내 새끼들’이라고 부른다. 나 역시 그랬고 거의 엄마에 버금가는 정을 주면서 아이들을 챙기고 먹이고 멘토 역할을 했지만 그것도 모성애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돈을 받고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 입장이었기 때문에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다만, 그 자신감 하나는 있었다. 내 아이에게는 이것보다 더 잘 해줄 자신이 있다는 믿음. 그럼 나는 기본적으로 모성애가 없는 엄마는 아닐 거라는 자신감.
그런데 너무나 뜻밖에도 출산 후, 처음으로 모유를 먹이기 위해 내 품에 아이를 안아 들었을 때 나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 아이가 방금 내 배에서 나온 아이가 맞는지조차 인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입을 연신 오물거리는 작고 쪼글쪼글한 생명이 내 품에 안겨 있었지만 여느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감격스러워 하며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가슴이 벅차 오르는 느낌조차 오지 않았다. 이 아이를 데리고 뭘 해야 하는 건지, 처리가 어려운 난감한 숙제를 받은 사람처럼 나는 내내 어정쩡하게 아이를 들고 있기만 했다. 계속 혓바닥을 바깥으로 내밀며 젖을 찾는 듯한 아이의 입매를 보면서도 선뜻 나는 내 가슴을 내어주지 못한 것이다.
이따금 아이가 놀아달라고 할 때마다 사실 난감하다. 역할놀이를 할 때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아이의 마음에 썩 들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한다. 순간 순간 아이가 나에게 코칭하는 대로 아바타처럼 말하거나 행동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내 다시 뭘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내가 재미없으니 아이도 그럴 거란 생각에 함께 놀아주는 시간이 고역이었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그 시간들이 두려워서 집안일을 한다는 핑계 뒤에 숨어 그 순간을 회피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쩌면 나는 모성애보다는 책임감으로 버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낳은 아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 아이와의 시간을 미션처럼 받아들여 해결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끊임없이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갈구했다. 나 대신 아빠와 하라고 하거나, 선생님 혹은 친구들과 함께 하길 권하면 아이는 세차게 도리질을 치며 굳이 나를 콕 집어 원했다.
“엄마, 같이 있어 줘요.”
처음엔 무섭다며 아이가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 들였다. 그러다 같이 놀자고 제안을 했고, 어느 정도 놀아주다 보면, 어느 새 아이는 나를 잊은 채 혼자만의 놀이에 몰입하곤 했다. 그제야 나는 조금 안도하며 아이 방의 침대 위에 앉아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했고, 이따금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슬며시 미소를 지어주면 그만이었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아이는 나와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해 주는 것이 없는데도, 아이는 내가 엄마라는 이유 하나로 나를 원하고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아이의 사회성 치료 선생님으로부터 아이의 학교 생활에 대해 듣게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과 함께 노는데, 그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 하는 게임이 별로 재미가 없고 심지어 자기가 계속 질 때도 있지만 그 아이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고 싶어서 싫은 마음을 꾸욱 참고 놀았다는 얘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과연 우리 아이는 행복에 담뿍 젖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는 순간을 얼마나 느껴 봤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함께 노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까르르 웃음 소리와 그 속에서 눈물 쏙 빠지게 웃고 있는 자신을 느낀 적이 있을까. 아이들과 한데 엉겨 있는 순간에 느꼈을 행복감과 이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을 아이는 알까. 서로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면서도 그 안에 악의가 없음을 알 수 있는 따뜻함을 아이는 과연 느껴 봤을까. 앙상한 아이의 팔뚝과 빼빼 마른 다리가 더 아이를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게 했다. 그 마른 몸 사이사이마다 따뜻한 물과 부드러운 지방이 차오르듯이, 아이의 몸과 마음도 행복한 감정에 담뿍 젖어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런 순간을 마련해 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은 나는 집에 오자마자 아이가 좋아하는 책 만들기, 카드 게임, 역할 놀이 등등 아이가 요구하는 건 모조리 같이 하기 시작했다. 물론 중간중간 아이가 방 안 가득 종이 쓰레기 천지로 만들어 놓거나 게임의 규칙을 어기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책을 만든다고 나의 에이포 용지를 25장 넘게 가져다 쓰기 시작할 때면,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나쁜 기억을 심어주고자 이 놀이를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의식적으로 내 감정을 꾸욱꾹 눌러 가며 아이와 함께 놀아줘야 했다. 아마 남편이 있었다면 조금은 그에게 미루는 마음도 생겼을 테지만 마침 남편도 늦게 들어온다고 연락이 온 터라 핑계를 댈 구석이 없었다. 이날 하루만큼은 아이와 놀아주고 케어하는 모든 일이 온전히 내 몫이었던 것이다.
아이에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는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아이는 영상을 보는 와중에도 계속 내 얼굴과 표정을 살핀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최근 들어 영상을 보면서 늘 특정 장면을 리플레이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늘 잔소리를 했었다. 한 번 시작된 영상을 끝까지 참아내며 보지 못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장면만 계속 반복하는 것이 ADHD 아이 특유의 강한 충동성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참고 보는 힘을 키워야지. 앞으로 돌리지 마.”
아이가 되감기 버튼을 누르면 언제나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아이가 어떤 장면을 반복해서 보는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내 눈에 거슬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아이가 계속 반복해서 보는 장면은 내가 함께 보면서 웃었던 장면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솔직히 내가 웃었는지 어쨌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얼핏 지나가며 스쳐 본 장면이었다. 그러나 뚱뚱한 닭들 여럿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부분에서 내가 피식, 했던 것만은 선명히 떠올랐다. 그때 피식하는 나를 보고 아이가 “엄마, 재밌어요?”라고 물어봤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물음에 난 조금 건성으로 대답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다고 말했을 때 아이는 나보다도 더 크게 소리내어 웃으며 내 피식에 최선을 다해 맞장구를 쳐 줬었다. 아이가 반복하는 장면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화면보다 내 얼굴에 더욱 집중했을 아이를 떠올렸다. 그동안 아이와 나의 시선은 얼마나 서로 엇갈려 왔던 것인가. 그럼에도 아이는 늘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내가 슬쩍 미소라도 지을라치면 활짝 웃어줄 준비를 하고서 말이다.
"오늘 저엉말 재밌었다!"
아이의 이 한 마디가 나를 아프게 콕콕 찔렀다. 친구들하고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고 늘 집에서 혼자 놀 거리만 찾는 것 같아 사회성 치료도 받고, 놀이치료도 한 건데. 생각해보니 그건 모두 남의 손으로만 해결하려 했던 거였다.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함께 웃으면 그것만으로도 결핍감은 채워질 수 있었던 건데 난 밖으로만 아이를 돌렸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엔 자자고 해도 자기는 아직 덜 놀았다면서 늦은 시간까지 안 자려고 고집을 부리던 아이가 이날은 잘 시간이라고 하자 바로 침대로 올라갔다.
팔 한 쪽으로 나를 안은 채 잠든 아이를 보면서, 나를 향한 아이의 맹목적인 애정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자기를 위해서 땡볕에 피자를 사러 나갈 때 현관문까지 쫓아 나와 "엄마 힘들 텐데 고마워요!" 라고 말해주고, 웃으며 손 하트를 날려주던 아이. 남편에게 내가 갈수록 늙어간다고 푸념했을 때 "난 엄마의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라고 말하며 나에게 공주님이라 말해주던 스윗한 아이. 병원 예약 시간을 넘겨 90분 넘게 기다려야 했던 날 진료를 받고 나오면서 아이에게, "힘들었지?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라고 말하자 "엄마도 고생 많았어요~"라며 나를 꼬옥 안아주던 아이. 내가 다치거나 아프면 남편보다도 빨리 달려와 괜찮냐고 물어주고 조그만 입으로 호호 불어주는 아이.
아이가 속을 썩이며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면 늘 생각했다. 어떻게 이런 애가 내 속에서 나왔을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다지도 마음 고생을 해야 하는가. 그런데 요즘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가 때때로 아이에게 너무나 따뜻한 위로를 받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떻게 이런 아이가 내 속에서 나왔을까, 어떻게 이렇게 귀한 아이가 내게로 왔을까.
한없이 부족하고 서툰 나인데도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믿고 의지하는 아이를 보면, 엄마에 대한 애정은 본능처럼 타고 태어나는데 모성애가 만들어지는 속도는 그걸 못 쫓아가는 것만 같다. 나는 아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엄마라는 존재가 되어 가는 중이다. 책임감이라는 이름에서 시작한 모성애는 이제야 간신히 씨앗의 형상을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능숙해지고 편하기보다는 아직 갈 길이 너무나도 멀었음을 느낀다. 언제쯤 아이가 내게 보여주는 믿음의 크기만큼 모성애가 자랄 수 있을까. 늘 나를 바라보며 기다려주는 아이를 자양분 삼아 나의 모성애는 조금씩 여물고 있다. 오늘도 나를 꼭 안은 아이의 체온 덕에 나는 조금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