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발적인 1이 될 결심
난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꽤나 어려웠다.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이 상했어도 그것을 잘 드러내지 못했고,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조언을 해 줘야 하는 건 당연히 힘든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싫은 소리를 입 밖에 내는 순간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던 듯 싶기도 하다.
“너가 이러이러해서 난 너무 속상하고 서운했어.”
이런 말은 아무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도 입 속에서만 맴돌 뿐이다. 입 한 번 떼는 것도 어려워서 상처받은 마음을 내 안 어디쯤에 아무렇게나 묻어 버리고 언제 그랬냐 싶게 멀쩡한 얼굴로 포장을 했다. 마음 속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낸 뒤에 맞이해야 할 불편하고 껄끄러운 상황들을 견디는 것보다 그렇게 묻어 두는 슬픔을 감당하는 것이 훨씬 더 나에겐 간단하고 쉬운 일처럼 느껴져서다.
그러다 감정이 쌓이고 쌓였을 때, 그래서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보다 고통스럽고 슬픈 기억이 더 많아지게 되면 난 결국 상대를 놓고야 말았다. 내 입장에서는 오랫 동안 속을 끓이다가 힘겹게 내린 결론이지만 상대방은 그런 나에게 늘 뒤통수를 맞았다며 원망의 말을 하기 마련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던 듯 연락을 주고 받던 사람이 갑자기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며 바이바이를 통보하니 황당할 만도 했다.
그러나 난 사실 하루 아침에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조금씩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의 신호를 알아채지는 못했다. 그냥 장난처럼 웃어 넘기거나 자기 일이 바빠 신경쓰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 ‘말’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으니 어쩌랴. 그저 조용히 마음에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밖에. 그렇게 그 사람과 헤어질 것을 각오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본심을 꺼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가까워진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 세 명은 모두 이전에 안면만 알던 사이였을 뿐 전혀 친하지 않은 무리였는데 모두 한 반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우리는 둘씩 앞뒤로 앉아 있었는데 학기 초반에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앉으라며 자리를 정했던 담임 선생님은 그때 배치된 자리를 일 년 내내 바꾸지 않는 무성의를 보임으로써 우리 넷의 사이는 더욱 끈끈해졌다. 뒤만 돌면, 혹은 앞 사람을 툭툭 치기만 하면 언제든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안 친해지는 것이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때 나의 짝은 은선이라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나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보이며 이제 막 친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벌써 ‘단짝’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첫날부터 나에게 매일 쪽지를 건넸다. 아무렇게나 공책, 연습장을 북 찢어 만든 그 쪽지에는 은선이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매 순간순간을 함께 하고 싶어하는지, 앞으로 이 우정을 얼마나 오래 유지하고 싶은지가 절절이 적혀 있었다. 그 아이의 적극적인 호감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내심 싫지 않았던 나는, 그 쪽지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자기 전에 답장을 쓰곤 했다. 그러나 나는 ‘단짝’이라는 말에 갇히고 싶진 않았다. 우리 넷은 늘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그 안에서 둘만 단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왠지 나머지 두 명을 배제시키는 기분이 들어서 괜스레 미안했기 때문이다. 죄 지은 것 없이,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나의 그런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은선이는 그때부터 나에게 더욱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침에 은선이가 교실 문을 들어설 때, 내가 다른 아이와 이야기라도 하고 있으면 은선이의 얼굴을 차갑게 변했다. 내 옆 자리에 앉자마자 공책을 꺼내서는 펜으로 사정 없이 휘갈기면서 공책이 찢어져라 펜으로 화풀이를 했다. 그 모습에 처음엔 당황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음엔 다른 아이와 수다를 떨지 않겠다고도 말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납득을 하지 못했다. 그런 날도 은선이는 나에게 쪽지를 보냈는데, 평소에는 곱게 접어 살포시 책상 위에 놓았다면 그 애가 화가 난 날은 쪽지를 구겨서 나에게 던지고 가곤 했다.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과 가까운 사이로 지내는 것이 싫다고 했다. 다른 애랑 이야기를 나누거나, 학교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것은 배신의 증거라고 했다. 다른 친구와 주말에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눴었는데, 은선이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 하지만 너무 무서웠던 건, 모두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 그랬냐 싶게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나 모든 아이들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 학년이 끝나갈 즈음, 나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은선이에게 절교를 선언한 것이었다. 은선이는 소리를 지르고, 통곡을 하고,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아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이야기해 보았지만, 그 애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것은 주변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네 명 중, 나머지 두 명은 은선이가 그동안 나에게 했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며 그 때문에 당연히 나의 마음 고생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난 ‘친구를 버린 모진 아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내가 은선이와 절교를 하면서, 그 친구들과도 그런 관계가 되고 말았다. 결국 그렇게 고통스럽게 보냈던 나의 1년은 그 세 명의 친구들과 멀어지면서 통째로 날아가 버린 셈이었다.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은 외로울 수 있겠지만 사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 사람이라 믿었던 사람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진정한 내 편 하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난 늘 외로웠다.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거릴수록 더욱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져 온 몸 구석구석 외로움에 사무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롯이 혼자가 되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1이 될 바엔, 자발적인 1이 되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남들과 갈등을 겪음으로써 그들과 멀어지는 일을 두려워했다. 그들에게 미움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이 겁이 났던 거겠지. 항상 남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고 그들에게 사랑 받고 싶었기 때문에 남들의 요구와 기대에 어긋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특히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은선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참는다고 꼭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억지로 참고 견디며 참아온 1년 동안 난 나머지 두 명과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들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관계는 꼭 갈등이 없어도 멀어질 수 있고, 갈등을 겪어도 내 사람이 될 수 있는 변수가 너무나 많은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각오해 보게 된다. 1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1을 각오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나 자신이 오롯이 설 수 있다면 당당한 1이 될 거라고. 그럼 그 1의 옆에 또 다른 누군가 와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