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어기면 이렇게 됩니다
1.
12년을 다닌 회사를 떠나던 날.
사람들은 내게 축하와 응원의 말을 건넸고,
몇몇은 눈물을 보였다.
내 자리에는 동료들이 직접 만든 감사패가 놓여 있었다.
몇 개의 퇴사 선물과 정성 어린 손편지도 이어졌다.
모든 것이 나를 붙잡고 있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고 밝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회사 문을 나섰다.
하지만 차에 타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그동안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회식 자리에서 함께 웃던 순간들,
밤새워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날들,
끝없는 회의와 논쟁 속에서도
내 일을 사랑했던 나날들.
나는 퇴사 직전 미리 마련해 둔 공유 오피스로 가면서 내내 울었다.
"멋지게 성공해서 돌아오자.
그리고 나처럼 되고 싶은 사람들을 도와주자!"
차 안에서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2.
사실, 회사가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가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사에 끝까지 남는다.
하지만 나는 고민했다.
내가 직접 나갈 것인가, 아니면 떠밀려 나갈 것인가.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완전히 결심하게 만든 사건이 생겼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회사 초창기 멤버였고, 빠르게 성장했다.
창립 초기, 다양한 방면의 업무를 경험하며 회사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승진도 빨랐다.
30대 중반에 팀장
40대 초반에 임원
그의 특징.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초반에 일을 확 벌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끝을 맺지는 않는다.
나는 그의 패턴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그 패턴에 당하고 있었다.
회사는 2~3개월마다 반드시 어떤 큰 이슈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에 벌려 놓은 일들이 슬며시 묻히는 경향이 있다.
그는 그 틈을 이용했다.
그는 이것을 이용해 처음에 일을 크게 벌여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결코 마무리하지는 않는다.
사실 처음부터 그럴 의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무언가 큰일이 발생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며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겼다.
그 사람은 회사를 너무 잘 알았고,
나는 그런 그를 잘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싫었다.
그리고 그 사람도 나를 싫어했다.
그날은 팀의 회식 자리였다.
그는 내가 속한 본부의 임원이었기 때문에 굳이 따라왔다.
그리고 내 후배들을 하나하나 붙잡고 돌아가며 꼰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피했다.
하지만 끝까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요즘 고민 많아 보이던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나는 처음에는 웃으며 넘기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저, 어차피 회사 그만둘 거예요."
그는 멈칫했다.
그리고 한참을 쳐다보더니 물었다.
"왜? 뭐가 문제야?"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이 싫어서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다른 문제도 있겠지? 돈 때문에 그래?"
나는 대답했다.
"돈이요?"
"응, 원하는 금액이 있는 거야?"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3억이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 날로 사표를 냈다.
3.
사표를 제출하자, 부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 연봉을 25% 올려줄 테니 남아달라고 했다.
나는 1년을 더 다니겠다고 했다.
하지만 여러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6개월 만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나는 당당하게 독립해서 멋지게 성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거대한 벽과 실패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20년 동안 회사에서 쌓은 경험이 있는데, 뭘 해도 성공할 수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사업에 뛰어들었고,
수많은 실패를 했고,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2년 만에 모든 걸 잃었다.
4.
나는 최근까지 나를 이용했던 사람의 사무실에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움직이며, 그의 사업을 도왔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가 다니던 회사에도 물건을 납품해야 해."
(그도 나와 같은 회사 출신이었다)
순간 숨이 멎었다.
"네?"
"너도 알잖아. 거기가 제일 큰 매출처야. 네가 좀 도와주면 좋겠어."
나는 고민했다.
하지만 돈이 필요했다.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결국 그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퇴사했던 바로 그 회사에,
물건을 납품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5.
비참한 심정으로 회사의 문을 열었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들.
하지만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외부업체"로.
나는 느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저 사람… 김차장 아니야?"
"아니, 김차장이 왜 여기와 있어?"
"뭐야, 사업 망해서 납품업체 직원 된 거야?"
그들의 속삭임이 내 등 뒤에서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나는 12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떠났다.
그런데 이제, 납품업체 직원으로 다시 서 있다.
수치심이 몰려왔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울분을 삼키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 정말 이대로 끝낼 거냐?"
5.
퇴사하던 날, 나는 차 안에서 다짐했다.
"멋지게 성공해서 돌아오자.
그리고 나처럼 되고 싶은 사람들을 도와주자!"
하지만 아직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실패한 걸까?
아니다.
아직 과정일 뿐이다.
성공의 타이밍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다시 홀로 서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길 위에 있다.
그리고 지금도 가고 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 발로, 내 힘으로 걸어가고 있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6.
이제 그동안 내 얘기를 들어왔던 사람은 알 것이다.
퇴사 후, 성공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다.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힐 것이다.
생각보다 오랜 길을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가보려고 한다.
그곳에서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새로운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넘어지고, 부딪히고, 또다시 일어나면서.
포기하지 않는 한,
실패도 그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