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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짚은 아이

by 레잇 블루머


배달 일을 하다 보면 마주치는 풍경들이 있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의 모습들.

도로가, 골목이, 내 일터가 된 이후에야 보이기 시작한 풍경이다.


운전을 할 때 특히 신경을 써야 할 풍경은 어린이 보호구역이다.

괜히 서두르다 속도나 신호를 위반하면 하루 일당이 날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안전이 먼저다.


학교와 학원 앞을 오가다 보면 이상한 풍경을 종종 마주친다.

출퇴근 시간이 아님에도 교통이 정체되는 특정 장소들이 있다.

공통점은 하나였다.

승용차들이 줄지어 도로 한쪽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

학교가 끝나기 직전, 외제차를 비롯한 고급 승용차들이 일제히 도착한다.

아이를 태우기 위해.

아이들은 익숙하게 그 차에 올라탄다.


그 모습을 지나칠 때,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골목 어귀, 낡은 주택가를 향해 걷는 아이들.

누군가는 문을 열고 시원한 차에 오르고,

누군가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뜨거운 골목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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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학교가 끝나고 걸어서 집으로 가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극명한 대비 앞에서, 시큰해지는 마음을 매일 참아야 했다.


어릴 적 내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리라.

무거운 가방, 외로운 골목길, 집에 가고 싶지 않았던 하굣길.


내가 어린 시절에 살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바로 그 주택가.

그 길을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똑같이 걷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살던 곳에 아직도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만들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비가 한바탕 내리다 잠시 멈춘 늦은 오후.

평소엔 잘 가지 않는 먼 곳으로 배달을 가게 되었다.

도착해 보니, 그곳은 말 그대로 ‘산동네’였다.

올라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언덕 각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야 할 길이었다.

차는 헛바퀴를 돌았고, 올라가는 내내 엔진이 비명을 질렀다.


배달지는 언덕 중간.

차를 세우면 미끄러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찌어찌 차를 조심스레 세우고 천천히 내렸다.

언덕 밑을 내려다보니,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한 명이 천천히 그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 발걸음, 손에는 우산이 지팡이처럼 들려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주택 입구로 들어섰다.


진짜 사람이 사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낡은 집이었다.

물건은 다행히 무겁지 않았다.

순간, 보통은 그러지 않는데, 물건이 너무 단출해서 전표에 적힌 목록을 보게 되었다.


사과 5개, 오이 5개, 가지 3개, 애호박 1개, 수입 소고기 1팩.


그 정도였다.

이만큼 사려고 그 먼 곳에 있는 마트까지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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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몇십 년 간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슴이 아려왔다.

높은 산동네, 낡은 집, 단출한 장바구니...

우리 엄마도, 우리 할머니도 그랬을까?


배달을 마치고 나와보니, 아까 보았던 학생이 내 위치를 넘어 계속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힘겨워 보이는 뒷모습.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한걸음, 한걸음.

길 고양이 한 마리가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고양이도 힘들었는지 옆길로 빠져 사라져 버렸다.

학생은 멈추지 않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 시선이 내가 잘 갔는지 확인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아슬아슬한 위치에 정차해 있는 내 차와 물건을 내리는 나를 보았으니까.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아까보다 더 큰 통증이 밀려왔다.

물리적인 통증처럼 아팠다.

나는 차에 올라탔고, 차가 언덕을 내려갈 때,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운전대를 잡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아아아아아!! 이 거지 같은 세상아!!!"


울부짖듯 외쳤다.


"얼마나 더 올라야 할까!!!"

"매일 이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데!!!"

"눈이라도 오는 날에, 이 언덕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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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업을 한답시고 돈을 빌려 흥청망청 써봤다.

자가용을 몰고, 택시를 탔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즉흥적으로 샀고 비싼 식당을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나는 나의 잘못들을 다시 한번 직시하게 되었다.

나는 망해도 싸다.


좋은 환경을 불평하며 허세 부리고 살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는 한편,

태어난 곳에서 정직하게만 살았는데도 벗어날 수 없는 언덕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쉽게 말한다.


“노력하면 돼.”

“마음먹기에 달렸어.”

"월 천만 원? 우스워."


쉽게 내뱉는 그런 말들이 얼마나 거지 같은 말인지, 나는 그날,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실패한 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교만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언덕 위의 골목 앞에서, 나는 진심으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의 교만함, 나태함, 온갖 거짓과 술수, 불평, 불만 등이, 이 풍경 앞에서 다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불평을 멈췄다.

‘이 일이 힘들다’는 말도 쉽게 꺼내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래도 차로 이 언덕을 오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매일, 발로 오른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고급 승용차들이 줄 서서 태워가고,

어떤 아이들은 높은 언덕을 혼자서 올라가고 있다.


나는 불평할 자격이 없다.



나를 돌아보던 그 학생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니, 잊혀지지 않길 바란다.

그 언덕이 언제까지고 내 모습을 되비쳐주길 바란다.



다음에 다시 그 언덕을 가게 된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다.

그때는 더욱 정성을 다해, 조심스레 물건을 전달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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