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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서

by 레잇 블루머


아직 본격적인 무더위가 오기 전,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배달지는 오래된 주택가.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구조라,

짐을 내려 카트로 실어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

총 세 번을 왕복해야 했다.

카트를 끌고 골목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또 내려오고.

다시 차로 돌아와 짐을 싣고, 또 돌아가고.


그러다 골목 어귀에서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손자였다.


손자는 연신,

“할아버지, 이거 해봐. 여기 돌려봐. 이게 빠졌어!"

하면서 옆에서 귀엽게 참견하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붙잡고 진지하게 고치고 계셨다.



나는 카트를 끌고 지나가며

그 장면을 세 번이나 봤다.


왕복하는 내내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자전거를 고치는 투박한 손,

귀여운 손자의 목소리,

참 보기 좋았다.


‘이게 바로 삶이지.’

‘이런 게 사랑이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문득 떠올랐다.

나는 할아버지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할아버지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 쪽, 어머니 쪽 모두.

이상하리만큼 남자 어른이 없는 집안이었다.


명절이면 할아버지를 찾아뵙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들의 묘소를 찾아가 절을 올리는 게 전부였다.


그런 기억 탓인지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누는 일상적인 장면이

내겐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다.


어릴 적

나를 손으로 안아 올려줄 사람,

내 말을 다 들어줄 것 같은 사람,

나 대신 나를 믿어줄 것 같은 사람,


그런 ‘어른 남자’는 내 인생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그 자전거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은 내게 이상하리만치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짐을 배달하고

카트를 끌며 차로 돌아오던 길,

그 장면이 또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공구를 확 짚어 던지며 외쳤다.


“이 #%@놈의 새끼! 좋은 거 사주면 뭐 해! 이놈이 또 고장 냈잖아, 또! 으휴 진짜.”


… 버럭.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들은 게 맞나 싶었다.

카트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눈이 흔들렸다.


조금 전까지

영화처럼 아름답게 감정선을 쌓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낯선 장면 앞에서

혼자만의 소설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자상한 할아버지의 정,

든든한 보호자 이미지,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가르쳐주는 장면...


그 모든 게

"이 #%@놈의 새끼!" 한마디에 날아갔다.


차로 돌아가는 길,

나는 혼자 피식 웃었다.


오늘도 나는

내가 본 것을 그대로 믿었고,

내가 겪지 못한 것을

너무 쉽게 동경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화를 내셨고,

손자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카트를 접어

차 트렁크에 넣었다.


그날 맑은 하늘의 골목에서,

나는 잠깐 ‘이 죽일 놈의 사랑'을 보았다.


그날 그 자전거는 고쳐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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