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마스는 사랑을 싣고

by 레잇 블루머


'오늘이면 끝이다.'


지난번 소금 사건(1화 참조) 이후, 나는 이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었다.

그날은 용역업체와 협의한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이 일은 정말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너무 불공정하고, 너무 불합리해. 이 사람들은 나를 그냥 배달 기계로 쓰고 있을 뿐이야.'


혼잣말로 이 일에 대해 갖은 악평을 퍼부으면서, 한 집 한 집을 돌고 있었다.


'가만있어보자, 주소가... 아, 저 집이네.'


배달 전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4층.

내가 돌고있는 지역 중에서도 가장 언덕이 많고, 오래된 주택들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이기도 하다.


아직도 개발이 덜 된 이 지역에는, 내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있던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는커녕, 복도 센서등조차 없는 곳들이 많다.


주택 옆에 차를 대려는 순간, 반대편에서 내가 일하는 마트의 다마스 차량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직원 배송 기사 형님들이 타는 차량이었다.

마트에 정규직으로 소속된 배송기사는 총 세 분. 모두 나보다 띠동갑 이상 형님들이다.


일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데다, 하루 대부분 각자 배달을 다니다 보니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래도 내게 그분들은 늘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말하진 않았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4층까지 박스를 낑낑대며 옮기고, 숨을 고르며 내려왔을 때,

아까 스쳐 지나간 줄 알았던 다마스 차량이 내 차 뒤에 멈춰 서 있었다.


형님이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어, 형님? 저 기다리신 거예요?"


형님은 말없이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배달 전표였다.


"이거 너 해라."


그날의 배달 전표는 내가 배달한 건수를 증명하는 문서였기 때문에, 한 장 한 장이 돈이었다.

한 장당 3,500원.


형님이 배달하신 전표를 내가 배달한 것으로 하고 돈을 더 받으라는 뜻이었다.


"아니, 형님 이거를 왜... 안 주셔도 되는데요..."


형님은 무심하게 말했다.


"나는 월급쟁이라 건수로 돈 받는 거 아니라 괜잖여. 대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분다이."


"... 네. 감사합니다, 형님."


고개를 숙였는데, 마음 한구석이 조금 꿈틀거렸다.


"글고 니 다음 배달 어디냐?"


"아직 이 동네에 몇 개 더 남았습니다."


형님은 내 차의 짐칸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두어 개 더 실을 수 있겄제?"


이번 회전의 중반부라 짐칸엔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형님은 자신의 차량에서 박스 두 개를 꺼내 내 차로 옮겨주며 말했다.


"이것들 무겁지도 않고 이 근방인 것들잉게, 너가 도는 김에 돌아라잉."


쉬운 배달 건을 나에게 넘겨주신 거였다.

그렇게 나는 거의 힘을 들이지 않고 14,000원을 더 벌게 됐다.


형님은 다시 차에 오르며 한마디 덧붙였다.


"찬찬히 해, 찬찬히."


그리고 덜덜거리는 다마스를 몰고 건너편 골목으로 사라지셨다.


......


나는 '찬찬히' 트렁크를 닫고, 운전석 문을 열어 앉았다.

문을 닫았지만, 출발하지 않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뭔가 울컥한 것이 올라왔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방금 받은 건 뭘까.


돈일까?

정일까?

관심일까?

연민일까?


형님에 대해 생각했다.


60대에 가까운 나이.

흰 머리카락이 대부분인 짧은 머리.

절뚝이는 한쪽 다리.

늘 미소를 머금은 얼굴.

틈날 때마다 꺼내 무는 담배.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사연이 있는 인생이 느껴졌다.


또 나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시간을 살아왔지?

나는 지금 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지?

도대체 내 현실은 왜 이렇게 비참하게 느껴지는 거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비교'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 과거의 나, 동료였던 사람들, 온라인 속 성공신화...



모두가 나보다 훨씬 나아 보일 때,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실패자로 보고 있다.



당장의 고통이 너무나도 구체적이기 때문에,


불면의 밤, 무거운 박스, 치솟는 기름값, 돈 갚으라는 알림...


이 모든 '현실의 감각'은 너무나 날카롭고 나의 매 순간을 찢고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형님이 전표 두 장을 넘겨주시는 순간,

내 고통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아주 작고 희미하게나마 '함께'라는 감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잠시 망설였다.


......

......

......


이윽고 나는 용역업체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아직 대체 인원 못 구하셨으면 제가 그냥 계속하고 싶습니다. 말 바꿔서 죄송합니다.”




문자를 보내고,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차창 밖엔, 여전히 똑같은 골목길.

하지만 마음 어딘가는,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keyword
이전 02화나는 오늘도 3,500원을 들고 계단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