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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소금을 포함한다

by 레잇 블루머


"이거 다 치우고 가세요."


긴 하루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음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았다. 나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며, 목구멍 너머로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네... 깨끗이 치우고 가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직은 쌀쌀한 5월 초의 일요일 저녁, 빗방울이 차가운 바람에 섞여 내렸다. 마트 배송을 시작한 지 겨우 닷새째. 신축 아파트 단지에 20킬로그램짜리 소금 한 포대를 배달하고 있었다. 트렁크를 열고 핸드카트를 조심스럽게 펼쳐, 묵직한 포대를 눕혔다. 이번 회전의 마지막 배송이었다.


숨이 거칠어졌다. 더운 숨을 내쉬며 주소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혹시라도 잘못 배송이 되면 다시 회수하고 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긴 하루의 끝자락에서 작은 실수 하나가 힘들었던 하루를 더욱 힘들 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동현관 호출 버튼을 누르고, 낯선 입구가 열리자 느린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요즘 아파트들은 복도를 왜 이렇게 미로처럼 지어놓은 걸까. 복도와 복도를 지나, 꺾이는 코너를 몇 번이나 돌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아니면 설계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곧 멈췄다.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빨리 일을 마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 이번 회전의 마지막 배달이지만, 업무 종료인지는 불분명했다. 마트로 복귀해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근하라는 전화가 없는 걸로 봐서는 아직 배달할 물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11시간째 이어지는 배달.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배달지 앞에 도착해서 한 번 깊게 숨을 고르고, 카트에서 소금 포대를 들어 올리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게감이 아까와는 달랐다. 그리고 바로, 눈앞이 하얘졌다.


포대가 5분의 1쯤 비어 있었던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배달지의 현관까지 소금이 줄줄 새어 나와 있었다. 흘러내린 소금이 복도에 하얀 선을 그었다. 포대 입구가 터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문이 열렸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성이 나타났다.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흘러내린 소금길 위에 멈췄다.


숨이 막혔다.


"죄송합니다... 포대 입구가 터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새 제품으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은 한동안 말없이 상황을 바라보더니,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됐어요. 대신 이거 다 치우고 가세요."


문이 닫혔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걸 어떻게 치우지?



청소도구는 당연히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입고 있던 우비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소금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다행히 장갑은 끼고 있었다.


무릎이 저리고 등과 허리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비와 땀으로 얼룩진 안경 렌즈 위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지금의 손으로는 눈물을 닦아낼 수 조차 없었다.


한 이십 분쯤 치웠을까?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이제 가자.'


굽혀져 있던 허리를 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쪽도 흘러내린 소금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아, 끝이 아니구나.'


다시 쪼그려 앉아 엘리베이터 바닥의 소금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승강기가 열릴 때마다 입주민들이 나를 쳐다봤다. 어떤 이는 눈을 피했고, 어떤 이는 혀를 찼다.


나는 계속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참 후 겨우 엘리베이터를 마무리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따라 소금이 흘러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트렁크에서부터 공동현관, 엘리베이터, 고객의 집 앞까지.


다시 우비를 펼치고 쪼그려 앉아 소금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염분 섞인 액체가 뺨을 타고 흘렀다. 쪼그려 앉아, 땀과, 눈물과 소금을 함께 닦았다. 얼굴이 쓰라렸다. 몸도 쓰렸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엘리베이터에서 공동현관 입구로, 현관 입구에서 주차장으로, 주차장에서 배송 차량으로 쪼그려 이동하며 계속 소금을 쓸어 담았다.

입차와 출차를 하는 차들이 계속 내 옆을 스쳐 지났고, 여러 입주민들과 라이더들도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2년 전만 해도 나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글로벌 회사, 연봉 7천만 원, 남들이 부러워하는 경력. 충분히 괜찮은 삶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회사를 나왔다. 더 큰 꿈을 좇겠다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건 허상이었다. 누군가의 달콤한 말에 속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속았다. 돈은 물 새듯 빠져나갔고, 수익은 거의 나지 않았다. 망해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달렸다. 그렇게 천천히 무너져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바닥에 앉아 소금을 쓸어 담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하기 힘들어하며, "죄송합니다"만 되풀이하면서.


아까부터 멀찌감치서 한참을 지켜보던 입주민 한 분이 다가왔다. 그리고 다그치듯 말했다.


"경비실에 가서 빗자루 빌려가지고 꼼꼼히 치우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사정을 들은 경비원 분은 못마땅하다는 표정과 함께 고갯짓으로 빗자루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내가 포대를 잘못 다룬 건가?' '처음부터 열려있던 건가?' '미리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걸 왜 못 봤을까...'


끝없는 자책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일, 계속할 수 있을까?'


시간은 어느덧 8시를 넘기고 있었다. 마트 배송과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안 들어와?"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어. 고생했고, 다 치우면 마트로 들어와. 아직 몇 건 더 남았어."


마트에 도착하니 박스 몇 개가 더 쌓여 있었다. 말없이 짐을 싣는데 과장님이 옆으로 와 말했다.


"고생했어. 그래도 큰 경험 한 거야."


과장님, 저도 나이가 마흔 중반입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저도 경험 많습니다.


마지막 짐을 옮겨 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만둬야겠다.


나는 마트 소속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과장님께 말씀드릴 필요는 없었다. 나와 계약한 용역 업체 담당자와 얘기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화요일까지 근무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중간에 갑자기 빠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날의 배달은 밤 9시 30분에야 끝이 났다. 5일 연속 평균 12시간 근무. 앞으로 이틀을 더 하면 7일 연속 근무였다. 회복될 시간조차 없었던 몸이 구석구석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앞으로 이틀.

그래, 이틀만 더 버티자.


빗물과, 눈물과, 땀이 한데 섞여 흠뻑 젖은 얼굴을 옷으로 대충 닦아낸 후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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