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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을 위한 협주곡 제2번

#b2 110동 Allegro con moto

by 레잇 블루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처음 10초의 서주를 듣는 순간,

몸이 아니라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이건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다.

절망에서 퍼 올린 인간의 구조 신호이자,

희망으로의 다이빙이다.

연주는 잔잔하지만, 절규는 고요하지 않다.


이 곡을 쓴 라흐마니노프는,

당대 최고의 젊은 작곡가였지만 데뷔작이 혹평을 받으면서 극심한 우울증과 작곡 공포증에 시달렸고, 무려 3년 가까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무너져 있었다.


그는 정신과 의사인 니콜라이 달의 치료를 받으며 점점 잃었던 감각을 되찾았고, 그 복귀작이 바로 이 곡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협주곡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좌절의 어둠을 지나 다시 세상으로 건너오는 다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 또한 오늘, 그 다리를 건넌다.





슬며시 눈을 감는다.

숨소리를 죽이고, 귀를 좀 더 기울인다.

현악기와 건반 사이를 유영하는 동안,

나는 잠시, ‘음악을 감상하는 리스너’가 된다.


온몸에 흘러드는 선율이

잠깐이라도 힘든 삶을 잊게 해 준다.


세상의 요구도, 카드값 독촉도, 배달 전표의 무게도, 이 순간만큼은 무대 밖의 일처럼 멀어진다.


연주는 계속되지만,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부드럽지만 힘차게 도어를 열고 카트를 내린다.


그리고 트렁크에서 양파망 두 개, 생수 한 묶음, 계란 한 판, 그리고 배춧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쌀포대를 꺼낸다.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물건들을 내려놓은 후,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한다.


음... 이건 라흐마니노프도 몰랐던 감정선이겠지...


카트에 하나씩 담으며 다시 음악에 귀 기울인다.

마치 이 멜로디가 내 동선을 예측이라도 한 듯,

Allegro con moto - 빠르되, 유려하게.


내가 아니라 음악이,

나를 이끌고 있다.

힘들어도 비틀거리면 안 된다.

이건 협주다.

계란이 깨지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요새 많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나온다.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는 에어컨까지 나온다.

계단도, 언덕도 없다.

잠깐이지만 나에겐 일종의 호사다.


하지만 음악회 입장료라 치기엔

매번 경비원분께 신상을 털려야 하고,

주차장 동선이 너무 길다.

배달 한 번 하는데,

베토벤 한 곡을 다 듣는 수가 있다.


몇 번이나 길을 잃고,

몇 번이나 같은 벽을 돈다.


“어? 여기가 어디였지…?”

“아 왜 또 109동이야…”

"5,6호 라인이 있긴 한 거야?"


매번, 내가 찾는 동과 라인만 없다.


3바퀴쯤 돌고 나니, 숨이 약간 가빠온다.

질풍노도 n년을 달린 내 인생보다,

이 아파트 주차장이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나는 멈춰 선 채,

이곳이 협주곡의 몇 악장쯤인지 잠시 가늠해 본다.


그때쯤 비로소 110동이 눈에 들어온다.


“찾았다…!”


다시 한번 숨을 한번 길게 들이마신다.





어쩌면,

나는 지금 도심의 미로를 건너는

배달자와 청중의 경계선에 서 있는 걸지도 모른다.


목적지까지의 여정은

협주곡 악보처럼 들쑥날쑥하다.

양손은 무겁지만, 선율은 부드럽다.


그 사이, 인터폰이 울린다.


“누구세요?”


“나는 느림보 배송원입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마트 배달입니다.”


오늘의 협주는,

이제 막 1악장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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