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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요구르트

by 레잇 블루머


내가 다니는 동네엔

참 많은 할머니들이 산다.


생각해 보면 마트 배송이 시작되고 나서,

내가 가장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은 단연 ‘할머니’들이다.

동네 시장에 위치한 마트의 부동의 1위 고객층.

배달지 주소의 절반 이상이 노년층.


사실 젊은 세대들은 잘 오지 않는다.

불편하고, 좁고, 주차도 어렵고,

시장 특유의 냄새가 가득한 곳이라며 꺼린다.


이런 이유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들의 삶과 골목을 지나간다.


그중 어떤 분은 내가 도착하자

배달 상자를 직접 해체해 물건을 확인하신 뒤,

포장재와 집안 쓰레기까지 함께 내놔달라고 하셨다.

불편한 다리, 가파른 산동네.

그 모습 앞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어떤 분은

쌀 품종 오배송으로 교환해 드리러 다시 찾아간 나를 보며

“쌀이야 아무거나 먹으면 되는데, 뭐 하러 또 왔어. 아이고 왜 사람을 이렇게 고생을 시켜...”

하시며 안절부절못하시다가 냉장고에서 두유 두 개를 꺼내 쥐어주셨다.


또 어떤 할머니는

내가 도착하는지 2층 창밖에서 보고 계셨다.

무거운 박스를 집 안까지 들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현관문을 서둘러 열고 계셨던 거였다.


가끔은,

받은 물건 중 일부를 건넛집 친구에게 전해달라 하시고,


주소를 잘못 적어 하루 종일 헤맨 끝에

“나는 외운 대로 썼어, 노인네라 잘 몰라...”

하시는 목소리에 겨우 찾아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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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풍경 속의 할머니들은

다소 무례하거나,

흔히 말하는 ‘진상’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분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약해지셨으니까.

이제는 힘이 부족하시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나는 그럴 때마다 나의 할머니를 떠올린다.


우리는 서울에 살았지만,

새벽마다 할머니는 승합차를 타고 근교 논밭으로 일을 하러 나가셨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나는 언덕 아래까지 마중을 나갔다.

할머니의 소쿠리와

작업 도구가 담긴 주머니를 끙끙대며 들고

함께 걸어 올라오던 길.


그렇게 모은 할머니의 돈은

생활비가 되어 어머니에게 전해졌고,

때로는 아버지의 비상금이 되었고,

때로는 나의 용돈이 되었다.


그리운 할머니.

그 사고만 아니었다면

좀 더 오랫동안 내 곁에 계셨을 텐데...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 있다.

누군가 집에 오면

낯선 사람에게도 음료 한 잔 건네던 그 시절.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수리기사, 방문판매원, 배달기사, 집배원 아저씨 등.

그때는 ‘정’이 문화였고,

마음이 먼저였고,

다정한 행동이 예의였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생활은 더 바빠졌고,

마음은 더 조심스러워졌고,

대면은 가급적 피해야 할 일이 되었다.


‘프로페셔널’이라는 이름 아래

정은 감정 과잉이 되었고,

온기는 비효율의 반열에 올랐다.


그럼에도,

배달을 하며 하루에도 수십 개의 초인종을 누르다 보면

아주 가끔, 그 시절의 온기를 마주칠 때가 있다.


누군가는 박카스를 내민다.

꿀물, 비타음료, 얼린 생수,

심지어 직접 내린 아이스커피를 받은 적도 있다.


그리고... 어떤 날은, 작은 요구르트 하나.


ChatGPT Image 2025년 8월 4일 오후 12_39_52.png


그날,

나는 좁은 골목 안쪽

주차도 어려운 곳에 차를 대고

무거운 박스를 카트에 싣고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몇 층을 걸어 올라갔다.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작은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자, 이거 하나 마셔요.”


그렇게 내 손에 쥐어진 건,

냉장고에서 막 꺼낸 듯

차가운 요구르트 하나.


나는 할머니의 정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한 뒤

조용히 계단을 내려왔다.


바쁘게 흘러가던 하루에

잠깐 멈춰 선 시원한 쉼표,

할머니의 요구르트.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요구르트의 뚜껑을 땄다.


상큼한 향기와 함께

입안으로 새콤 달콤한 시원한 맛이 스며들었다.

작은 병 하나였지만 마음은 제법 큰 통으로 리필되는 기분이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이 한 병 덕분에

오늘 하루, 다시 힘내볼 수 있겠네요.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쓰레기봉투에 빈 병을 넣기 직전

무심코 눈이 갔다.


응...?


유통기한 2025-07-XX

...

...

3일 전...


잠깐 머리가 멍해졌지만,

이내 피식 웃음이 났다.


날짜는 상관없었다.

그건 분명,

내가 마신 그 어떤 요구르트보다

더 신선한 맛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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