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 성수

13화 봉숭아꽃 물들이기

by 왕눈이 누님

“애들 목욕시키게 물 한 대야 미리 받아놔라.”


은수언니 잔소리에 성수는 볼이 터져 나올거 같다.


마중물 두어 바가지 넣고 서너 번 펌프질하면 차츰차츰 물이 올라와 나중에는 어디서 올라오는지 희한하게 빨강 고무대야에 찬물이 가득 찬다.


그렇게 올라온 찬물에 열무김치 항아리며 무짠지, 참외장아찌 담가 우려내면 여름철 밥상의 주인이 된다.


종일 샘가에서 물을 갈아준 무짠지와 참외장아찌는 가늘게 채썰어 베보자기에 넣고 꼭 물기를 짠다.

별다른 양념없이 고춧가루 들기름 넣고 버물버물 무쳐내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하지만 금방 퍼서 올라온 샘물은 어린 한수 두수가 목욕하기에는 너무 차다.


미리 한 대야 퍼올려서 햇볕드는 곳에 두어시간 두면 적당히 데워져서 어린 동생들 목욕시키기 딱 좋다.


매일 하는 일인데 잔소리하는 은수언니가 괜히 얄밉다.


종일 방학숙제 한답시고 식물채집이다 동물채집이다 뛰어다닌 남철이와 한수, 꽁무니 따라다니느라 더 바쁜 두수는 꼬질꼬질 물구경 한번 못해본 아이들 모냥이다.


넓은 대야는 한수, 두수가 같이 들어가 앉아도 넉넉하다.

적당히 데워진 대야 물속에 별 군소리 없이 둘이 들어가 나란히 앉아 물장난을 한다.


비누거품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글거리게 닦아주고 마지막에 찬물 몇 바가지 끼얹어서 마루 끝에 올려놓으면 수건 자근자근 밟고 앉은 뽀얀 얼굴이 참 훤하다.


은수언니가 엄마를 도와 부추전, 풋고추전, 애호박전으로 들기름 냄새 풍기며 솜씨를 부리면 마루 끝 동생들은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솜씨좋은 엄마가 꽃잎 얹은 화전까지 부쳐내면 부잣집 잔칫상이다.


양푼에 열무김치 숭덩숭덩 썰어 넣고 무짠지 참외장아찌 무침 푸짐하게 넣어 고추장 들기름으로 슥슥 비벼댄다.

양푼 가운데 숟가락 다섯 개 푹푹 꽂아놓으면 쪼르륵 소리가 나는 오남매는 누구 숟가락이 더 큰지 내기 하는 것만 같다.


한낮에 따놓은 봉숭아 꽃은 명반 넣어 넓적한 돌위에 자근자근 찧어 짓이기고 엄마는 오남매 새끼손가락에 곱게 올려 흰 광목천에 광목실로 싸매준다.


한수와 두수는 답답하다고 찡얼대고, 세 딸은 예뻐질 생각에 가슴이 설레인다.


마당 가운데 깔아놓은 멍석 위에 나란히 누워있으면 동생들의 잠드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의 별이 하나 둘 멍석위로 떨어진다.


동생들 안아다가 정갈하게 깔아둔 이불에 눕히고 아버지 방 모기장 안에 자리끼까지 넣어드리면 여름방학 하루가 또 그렇게 저문다.


새끼손가락 봉숭아 물과 함께 오남매의 추억이 그렇게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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