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희랍어시간》 서평

사라져 가는 것들로 온전해지는 시간

by 김은예

한강의 <희랍어시간>은 사라져 가는 것들의 이야기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원인을 모른 채 말을 잃은 여자, 그리고 그들을 매개하는 사라진 언어 '희랍어'.


과거에 존재하였지만,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은 그것들.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없고,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내가 원할 때 필요할 때 할 수 없다.

나머지 감각들로 그것을 느끼고 표현한다.

가장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눈'과 '입'을 잃었을 때,

오히려 다른 감각들로 더 강렬하게 느끼고 표현된다는 것이 역설적이었다.


서로의 부족함을 가진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닌,

내가 가진 것들로 서로를 그저 안아준다.

저 가진 것들로 온전해진다.


볼 수 없어서 상대방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어서 나에 대해 알려줄 수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서로를 깊이 이해한다. 온 감각을 다해.


그리고 그 둘을 이어주는 또 다른 매개체 '희랍어'

희랍어는 매우 복잡한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단어로 문장을 표현할 수 있다.

볼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그들의 복잡한 마음도, 아팠던 과거도 단순한 침묵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이해된다.


어려울 것 같았던 힘들 것 같았던 그 시간이

함께할 수 없을 것 같던 시간이 이제 그 둘을 같은 공간 속에 있게 하였다.


그것이 <희랍어시간>이다.


--------- 가슴에 와닿은 문장 -------------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기 전에 이미 당신의 얼굴은 내 눈꺼풀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눈꺼풀을 열면 당신은 천장으로, 옷장으로, 창유리로, 거리로, 먼 하늘로 순식간에 자리를 옮겨 어른거렸습니다. 어떤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도 그토록 집요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왜 일 년 동안 까만 옷만 입어야 돼?

덤덤한 목소리로 그녀는 대답했다.

마음이 밝아질까 봐 그런 거 아닐까?

마음이 밝아지면 안 돼?

죄스러우니까.

할머니한테?..... 그치만 할머닌 엄마가 웃으면 좋아하잖아.

그제야 그녀는 아이를 돌아보고 웃었다."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 잠길 수 있다는 건."


"세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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