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E에게,
나의 사랑,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나요? 지금의 이 편지가 마지막이길 바라며, 나는 또 펜을 들어요.
당신에 대해 아무 소식도 들려오는 게 없어요. 나라의 중차대한 일은 모두 이렇게 시간이 걸리나요? 아마 나보다도 당신 속이 더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겠죠.
그래요. 중요한 일에는 으레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당신의 마음을 알고 나서 끙끙 앓아 가며 애 태우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요.
언제부터였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어느 날 문득 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느낌에서 생각으로, 생각에서 하나의 문장으로 구현되어 버렸을 때, 그때는 마치 머릿속에서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어요. 큰일이 났구나, 내 마음에 진짜 큰일이 났구나 하며 가슴을 쳤죠. 내가? 당신을?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후론 노력을 참 많이도 했어요. 억눌러도 보고,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도 해 봤죠. 어차피 결과는 하나였지만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확인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더라고요. 일부러 나쁜 점을 찾아보려 하면 오히려 좋은 것만 보이고, 상처 입은 당신을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데 그런 당신이라도 계속 보고 싶어서 내 눈은 당신이 있는 곳만 찾아다녔어요. 목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리고, 저기 멀리서 당신이 점처럼 보이는 순간부터 이미 마음으로는 당신 코앞까지 달려가 있었어요. 일주일에 단지 며칠, 몇 시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해서, 나머지 시간을 그리움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 힘에 부쳐도 견딜 힘이 났어요.
물론 슬프기도 했죠. 당신을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없다는 현실이 서글프고 답답했어요. 내 마음을 들켰다가는 모든 게 하룻밤 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끝이 언제가 되든 허락된 시간만이라도 함께하려면 내 사랑은 철저히 비밀이어야 했어요. 그림조차 마음대로 그릴 수가 없었어요. 내 기억 속에는 당신의 모습만이 차고 넘쳐 범람하니 기억의 밑바닥을 뒤지고 뒤져서 적당한 소재를 찾아 그림을 그려야 했고,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당신은 자꾸만 멍해지는 나를 걱정하곤 했죠.
그런데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야속할 때도 있었는데, 그런 당신이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니! 그걸 알게 된 순간 번쩍이는 강한 빛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던 거 있죠. 그간의 모든 것들이 한 번에 이해됐던 거예요. 사랑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보던 그 눈빛이, 애정이 흘러넘치다 못해 뚝뚝 떨어지던 그 목소리가, 나 혼자서 펼친 상상의 나래도, 자만한 착각이나 허무맹랑한 기대도 아니었던 거예요. 그야말로 진짜 큰일이 나 버린 거죠.
그 큰일을 피해 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그때 내가 당신을 놓쳤다면 어쩔 뻔했어요. 그 생각을 하면 얼마나 아찔해지는지 몰라요. 당신은요, 당신은 나의 하루를 아침부터 풍요롭게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 주는 사람, 잔뜩 얼어 움츠러든 마음이 포근히 안식할 수 있고, 내가 땅 위에 살아 있는 하나의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는 사랑이에요. 그런 사랑을 어떻게 놓쳐요. 당신과 멀어지지 않았음에 나는 늘 감사해요.
당신은 그때도 나를 걱정했고, 지금도 나를 걱정하고 있겠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당신과 재회할 날을 학수고대하면서 전보다 더 자주 추억을 떠올리니까요. 추억은 때때로 현재의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와 같아요. 알잖아요. 나는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당신을 기억할 수 있어요. 물론 당신을 기억하는 것보다 당신을 훨씬 더 좋아하지만요.
너무도 그리운 내 사람.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미래는 잠시 잊어요. 바로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해 사랑하듯, 오늘은 그냥 오늘을 살아요.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부디 평안하고 무사히.
진심을 담아,
당신의 오늘, 당신의 사랑,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