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날 때부터 없었던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이유로 곁에 없다는 것을 듣게 됐고, 제사상에 그 사람들의 사진이 올려진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다음에는 내 아버지의 어머니와 누이가 죽음을 맞이했는데, 어째서인지 다시 병원 지하로 돌아가 며칠 밤을 보내야 했다. 학창 시절 세명의 동무가 먼저 죽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 더 많은 가족이 죽었다. 모든 부재가 그렇듯이 막상 살아가는데 큰 불편은 없었으나,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 생각날 때면 마음 한 구석이 깊게 아려왔다.
나이를 먹고 돈벌이를 하며 소위 말하는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시작하자, 도처에 알지 못하는 이들의 죽음들이 늘어났다. 차장의 장모, 동료의 아버지, 사장의 형, 친구의 장인, 과장의 부인이 죽었는데, 그때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러 양복 비슷한 옷을 입어야 했다. 비닐을 덮은 장례식장 식탁에서 나는 편육을 먹고, 떡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처음 보는 사진 속 얼굴의 생애를 추모하며 전을 먹고, 땅콩과 오징어채를 집어 먹다가 막차시간이 다 돼서야 그곳에서 퇴근했다.
장례식장 다닐 일이 늘어가며, 나와 동료들은 전국의 대학병원 장례식장과 지역 장례식장 음식을 품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부분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음식들이기에 맛과 질을 논한다는 것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잡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대화에서 장례식장의 수준을 판단하는 잣대로써 육개장 맛이 언급됐는데, 나는 수긍하기 어려웠다. 이 음식은 전국 동서남북의 어느 냉동실에서 나왔다고 해도 다르지 않은 재료와 농도와 냄새를 공유했는데, 어린 시절 먹어왔던 육개장에는 한참 못 미치고, 급식실 육개장 수준보다 다소 양호한 수준이다. 내 어린 시절이라고 해봐야 고작 30여 년 전 얘기다. 30년 넘은 맛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래도 기억되는 맛의 단편들은 진한 파의 향과 고사리와 쇠고기의 향이 제법 강한, 농도 짙은 맛의 기억이다.
그러나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초상집에서 육개장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내 고향과 친척들이 모여 살던 평화로운 촌에서는 누군가가 죽으면 마당에 큰 천막을 치고 솥을 걸었다. 그 솥 안에서는 쇠고기와 무와 대파가 둥둥 떠다니는 맑은 쇠고기 곰탕이 사흘에서 닷새 동안 거친 김을 하늘로 내뿜었었다. 그 국물은 맛이 깊고 유순해서 초상집에는 남녀노소가 붐볐다. 시뻘건 고춧기름을 입에 묻힌 문상객을 보는 일이 나로서는 아직까지도 낯선 일이다.
요즘 초상집에는 아이들이 먹을 게 없어서 그런지 나이 든 것들만 가득하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다 초상집으로 달려온 생기 없는 그 나이 든 사람들은, 매운 국물에 독한 술을 연신 들이붓는다.
나는 내내 그 시뻘건 탕국을 탐탁지 않아했으나, 내가 상주가 됐을 때에는 경황이 없어 육개장을 물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