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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창 Sep 03. 2022

시래기 블랙홀

 10여 년 전 DMZ 관련 프로젝트 답사차 양구에 들른 적이 있었다. 접경지의 어수선함과 고요함이 공존하는 읍내를 지나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향하던 관광전세버스는 해안면에 위치한 시래기 가공장에 멈춰 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침식분지지형의 그 마을을 6.25 전쟁 당시 미군들은 펀치볼(punch bowl)이라고 불렀다. 수많은 전투와 폭격으로 탄피가 구르고 초연이 가득했을 산야에는 끝도 없이 널려있는 시래기만 말라가고 있었다. DMZ 연구와 시래기가 무슨 연이 있을까 싶었지만, 거의 모든 DMZ 관련 연구사업이 그렇듯이 꽃놀이패 연구원들은 지자체의 경제사업을 치켜세우는 부역을 통해 여비를 충당했으므로, 우리는 시래기 덕장을 순방하며 입을 모아 공무원들의 치정을 칭송한 후에야 다시 전방으로의 여정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분단의 현장으로 통하는 관문은 시장 저 너머에 있었다.)

나는 버스에 앉아 저 많은 시래기들의 앞날에 관해 생각했다. 남한의 북쪽 끝에서 말라가는 시래기의 양이 저 정도인데 전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시래기들의 종착지를 나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 땅 어딘가에 거대한 시래기 블랙홀이 있는 게 분명하다.

 80년대 말 도심 변두리에 있던 내 고향마을 처마 밑 주황색 나일론 빨랫줄에는 영민이네고 준범이네고 할 것 없이 시래기가 걸려있었다. (어른들은 시래기가 가난한 시절에 먹던 음식이라고 말하지만 내 가난의 심벌은 우리 집 라면이다.) 섞박지나 생채 등을 만들 때는 빨랫줄이 반듯했지만, 김장철이면 장대가 휠 정도로 시래기가 가득했다. 우리 집에서는 돼지등뼈에 된장을 풀고 시래기를 넣어 푹 고아서 먹었는데, 어른들은 소주를 곁들여 탕과 고기를 먹었고, 몇 번인가 끓여대서 속까지 푹 익은 시래기는 다시 양념하고 잘게 썰어서 냉장고에 쟁여뒀다가 도시락 반찬이 되었다. 그 비릿하고 짭조름한 맛 아래 깔려있는 서늘한 햇빛 냄새를 떠올리면 할머니 냄새가 함께 생각난다. 시래기는 적어도 열 번 정도 찬물에 씻고 불려야 군내와 묵은 때가 빠지는데, 조선이 망하고 자유대한•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이 번거로운 작업은 오롯이 여인들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냄새를 바로 기억하지는 못해도 항상 시래기를 떠올리면 할머니 냄새가 따라온다.

 제아무리 집집마다 시래기를 말려두고 먹었던 농경민족의 후예라 할지라도 펀치볼에서 본 시래기들의 양은 그 자체만으로도 도무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화 불가한 양으로 보였다. 그 설명 불가한 양의 시래기가 소멸되는 시래기 블랙홀을 나는 살면서 두 차례 목격했는데,  첫 번째는 내가 일하던 곤지암 어귀 네댓 곳의 공단 식당 들통이었다. 사시사철 멸치 따위를 넣고 양념한 시래기 볶음과 시래기 된장국이 나왔는데, 성의 없는 똥국보다는 참을만해서 남기는 일 없이 밥을 말아먹었다. 두 번째 시래기 블랙홀은 현재 내가 입원 중인 병원 조리실임에 틀림이 없다. 주 1회 이상 시래기로 만든 국이나 무침, 볶음이 나오는데, 제철음식(2022년 1월에 쓴 글)이라는 계절적 요인이 조금은 있겠지만, 이 시래기 블랙홀이 창조된 배경에는 영양사들의 과학적, 의학적 소견과 친절한 간호사들의 주술적 인사말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 간호사들은 친근하게 다가와 몸상태와 신변에 대한 가벼운 대화를 이어가다가도 대화 말미에 다다르면 약간 진지한 태도로 "그런데, 대변은 보셨나요?" 하고 물어온다. 이건 맺음말이나 인사말 정도로 인식되는데, 사실 규칙적 배변이라는 것은 치료의 핵심중 하나일 것이다.  적절한 영양분이 때에 맞게 몸에 들어오고 때에 맞게 몸 밖으로 배출되는 순환은 혈류와 기의 순환이고, 이 과정에서 영양과 약물은 서서히 축적되고 독소는 빠져나가 살과 뼈는 아물게 된다. 그 간호사들의 바람이 겉돌지 않도록 영양사들은 시래기를 처방하는 것이다.
시래기 블랙홀에서 유영하는 환자들의 장에서는 양질의 영양소와 섬유질들이 매일매일 새로운 변을 창조하고 배출시킨다. 이 순환의 끝에서 그들의 몸은 아물고 집은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데, 마침내 시래기 블랙홀은 병원과 집 사이에 인터스텔라를 지워낸다.

 환우들이여 쾌변 하시길.
산북과 곤지암의 노동자들이여 쾌변 하시고 병원에서는 마주칠 일 없기를.

• 자유대한의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였다.
•• 공단이라 부르기에는 산개되어 있지만 제법 많은 제조, 가공, 물류 공장이 있으며, 그 사이사이 가건물로 지어진 00뷔페, 자매식당, 삼거리식당 등의 간판을 건 함바집 유형의 식당이 있다.
••• 국토교통부 국립교통재활병원 교통사고, 산업재해로 인한 뇌손상, 척추손상, 근골격 손상을 입은 중증외상환자들이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이 글을 끝마친 날 저녁에도 시래기 된장국이 병원 식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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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청 시래기> a4종이에 수채 2022

<국립교통재활병원 시래기 반찬> 사진기록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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