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영국여왕이 방한했을 때 에도 한복을 입은 파마머리 여인들(어째서인지 여왕과 같은 헤어스타일)이 조선 왕이 사용하던 다기에 하동녹차(안동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보성 보다는 하동녹차일 것으로 추측한다)를 대접하는 장면을 TV로 본 적이 있다. 가끔 녹차에 관한 뉴스도 접하는데 보성인지, 하동인지, 제주도인지 어찌 됐건 대한민국 영토에서 자라고 가공된 녹차가 어떤 단체에서 주관하는 품평회에서 높은 품질을 인정받았다는 소식이 대부분이었다.
기사는 눈에 가까웠으나 혀와 코에 닿지 못했다.
몇 해 전 회사 지게차 주유를 위해 회사 앞 셀프주유소에서 경유를 채우고 있던 중에 휘발유를 주유하던 콜라 영업차량 라디오에서 녹차에 항산화물질이 풍부해서 노화방지와 암 예방에 탁월한 효능이 있다는 진행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나는 주유를 마치고 지게차를 도크 앞에 주차한 후 탕비실로 향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믹스커피 아래 기단처럼 박혀있던 녹차 상자를 열어 티백 하나를 꺼냈다. 그마저도 현미녹차였으나 분명 녹차가 들어 있으니 불로장생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티백을 종이컵에 넣었다.
탁- 하고 불안한 소리를 내며 커피포트가 제 할 일을 마쳤을 때컵에 물을 따르고 분홍색 플라스틱 컵홀더를 끼웠다. 몇 분이 흘러 더 이상 진해지지 않은 녹차는 녹색보다는 박카스를 마신 후에 본 소변 색에 가까웠다.
주유비 지출에 관한 엑셀 작업과 영수증 정리를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녹차를 마셨다. 영수증에 풀칠을 하며 낙후된 시스템에 관해 쓴소리를 내뱉은 까닭인지 입속에 차맛은 쓰고 떫었지만, 몸에 좋다기에 티백에 남아있는 즙 한 방울까지 지긋이 짜서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때는 '역시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라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느 불혹의 유부남들처럼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딱히 건강이 나빠져서 회사를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회사생활 때문에 정신건강은 좋지 않았다)본격적으로 차를 즐기기 시작했고, 매체와 몇 권의 책을 통해 차에 관한 나름의 지식을 쌓게 됐다.
'우리는 시간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시간을 내서 차 우리는 방법을 숙지해 보자.
일단 녹차는 티백의 경우 75°C 이하의 물로 30초 정도만 우려내야 적절하다. 그 이상 우리거나 높은 수온으로 우려내면 카테킨 성분이 많이 추출되어 쓰고 떫은맛이 강해진다. (카테킨은 강력한 항산화물질로 몸에 이로울 수 있지만 과하면 차의 맛을 해치게 된다)
백 원도 안 하는 티백 하나를 펄펄 끓는 물로 마지막 진액 한 방울까지 모조리 짜내 마셨으니 과연 나는 검소한 대한의 국민임에 틀림이 없다.
밥 한 끼 값에 맞먹는 원두커피와 카페인 음료는 물처럼 마시면서 말이다.(다이내믹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