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서로의 상황이 너무나 맞지 않았기에, 서로를 향해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여자친구는 지방 발령으로 인한 강제 장거리 연애에 나는 잦은 야근이 필수인 임원 직속 감사팀. 피곤함에 찌든 와중에 주말에도 회사에서 연락이 오곤 하는데, 장거리 연애라니. 몸 이전에 정신이 버티지 못했다.
여자친구 역시 처음으로 본가를 떠나 낯선 타지 생활을 이어갔고 회사에서도 사수와의 트러블이 이어져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다. 자취 생활을 처음 시작했으니 들어갈 돈도 많은데, 그만두지도 못하는 회사에서의 트러블이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지만, 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와중에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거기에 이어진 양가 어르신들의 잦은 간섭. 특별히 여자친구 쪽의 부모님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는다는 것 같아서. 혼자 살기 시작한 여자친구를 두고 부모님의 간섭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 같았다.
마치 온 세상이 우리의 관계를 헤치려고 달려드는 듯한 압박 속,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결국 우리는 오랜 대화 끝에 원만한 합의 이별(?)에 성공하여 오늘, 마지막으로 이별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물론, 이별 여행이라고 해봤자, 우리 모두의 상황이 녹록지 않았기에 그저 못 만나는 와중, 나중에 시간 나면 다녀오자며 말이 나왔었던 충청권의 드라이브 코스나 다녀오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이별을 생각하는 와중에도 함께 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에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목적지는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물로 유명한 한 대형 댐. 그 근처의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좋은 날씨에 좋은 풍경을 즐기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와~ 경치 봐! 오빠 우리 얼마 만에 이렇게 나와 보는 거야? 진짜 기분 좋다….”
“그러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는 종종 이렇게 다녔던 거 같은데.”
“그때는 우리 차도 없어서 버스랑 전철 타고 어디든지 다녔지. 진짜 대단했던 체력이었어.”
“왜 그렇게 애늙은이처럼 말해? 몇 년 지나지 않았잖아?”
“우리가 만난 2년 반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지! 더군다나 회사에 있다 보면 세월이 2배로 빠르게 흐른단 말이야. 사실상 우리는 4년을 만난 거와 다름없어.”
“...뭐 4년을 만난 것 치고는 우리 생각보다 얼마 보진 못했다? 둘 다 너무 바빠서 실제로는 몇 개월 못 봤잖아.”
“그건 그렇지…. 하하 오빠는 아직도 T구나?”
“이건 T 나름대로 감성적인 표현인 거야. 아쉽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잖아.”
“으음…. 역시 오빠 말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어. 한 번쯤은 더 곱씹어 봐야 한다니까?”
“이 정도는 뭐 어렵지 않지 않나?”
“내가 문학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남친이랑 얘기하는 것도 작가의 숨은 의도를 따져가며 해야겠어?!”
직설적인 화법의 그녀와는 달리, 나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해서 한 번쯤은 돌려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썸도 비정상적으로 오래 탔었지. 나는 돌려 말하는 것이 습관이니 정말 열심히 애써서 마음을 표현했는데, 그녀는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난 분명히 썸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과의 소개팅을 나간다고 해맑게 내게 자랑해 왔을 때는 정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자존심과 그동안 살아온 가치관, 즉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차일 각오를 하고 한 걸음 내디디고 나서야 우리의 관계는 열매를맺을 수 있었다.
“처음에 우리 사귈 때 기억나? 너, 내가 호감 표시한 것도 하나도 못 알아듣고 나한테 소개팅 간다고 자랑했었잖아.”
“그…. 그건 잊어줘? 애초에 나도 어느 정도는 마음이 있었는데 맨날 친절하게만 대해주니까. ‘이 사람 원래 친절한 사람인 건가?’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잖아! 그리고 오빠도 그때 모두에게 너무 친절했어!! 공주병 안 걸리려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맞잖아?! 그러니까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리고 매일 같이 연락하는데 좋아하는 마음을 그렇게 오랫동안 말도 안 하고 숨기는 사람이 어딨어! 나는 나 혼자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지!”
“난 확실한 시그널만 있으면 다가가려 했어! 근데 나도 긴가민가하니까…. 그래도 너무 좋아했으니까. 포기가 안 되더라고.”
억지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속에도 나와의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이 불합리함을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빠 말하는 거, 처음에는 답답했는데, 나중에는 그 속에 나에 대한 배려가 녹아 있다는 것을 알고서 곱씹어 보는 맛이 있었어. 항상 데이트 끝나고 돌아가면 오빠가 나한테 했던 말들을 곱씹는다? 그러면 ‘아 그때는 몰랐는데, 오빠가 나를 이렇게 배려해 준거구나!’하고 생각하게 돼. 집에 가서도 사랑받는 기분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 인제 와서 말하지만, 정말 고마웠어! 오빠. 그….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아~ 아깝다. 진짜 좋은 남자였는데.”
“... 너도 마찬가지야.”
진짜로 아쉽다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그녀의 모습에 목이 메어왔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과는 별개로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다.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이 사랑할 시간조차 충분히 얻지 못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내가 과연 이 여자보다 더 마음이 맞고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내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평생 혼자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내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조차도 괜찮아진다고, 세상에 좋은 사람은 어디나 있고 그저 만나지 못했을 뿐이며, 사람은 사람으로서 잊는 거라고들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랴. 나는 내 뒤에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 눈앞의 그녀만 내 곁에 있다면 그 뒤엣것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 떠나보내야 한다니. 우리가 더 나은 환경에서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우리가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조금 더….
“...좋은 상황? 얼마나 더?”
“응? 뭐라구 오빠?”
이별의 아쉬움을 곱씹고 있으려니 문득, ‘나랑 여자친구의 사이인데 환경이 뭐 어쨌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얻는다고 한들 그게 무슨 만족을 줄까. 아무리 넘치는 돈이 있고 평안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그 모든 것을 함께 누릴 그녀가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가난하고 바쁜 와중에라도 잠깐 만나, 아무도 보지 않는 삼류 영화를 함께 보고 어두워진 공원을 그녀와 함께 거니는 그 시간은, 분명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행복을 주었다.
전자는 대체 가능한 작은 즐거움이었다면, 후자는 대체 불가능한 행복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내가 작은 것을 위해 큰 것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있잖아. 인제 와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나 솔직히 말해도 돼?”
“응. 말해봐. 인제 와서 서로 숨길 게 뭐가 있어?”
“그…. 나는 그동안 솔직히 너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 같아.”
“...그래? 아까까지는 마지막까지 사랑해 준다 말해놓고 결국은, 밀어내는 거야?”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새겨들으려, 반짝이던 눈동자가 빠르게 빛을 잃어갔다. 순식간에 붉어지는 눈시울과 울먹이는 목소리. 그녀는 표현은 직설적이었지만, 마음만큼은 감성적인 부분이 많았다.
연인의 작은 말 하나에 감동도 받고 토라지기도 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여 다투던 일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마지막이겠지.
“...솔직한 내 마음이야. 만약 내가 너를 사랑했다면, 내 모든 상황이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너를 나의 모든 것보다 사랑했다면, 너의 곁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지 않았을까?”
“...”
여자친구의 부모님께 평생 미움을 받으면 어떻단 말인가? 내가 쉴 틈이 없다면 어떻단 말인가? 재정적인 여유가 없다면 또 어떻단 말인가? 만약 그 모든 것이 거슬려서 여자친구를 포기할 생각을 했다는 건 그녀를 잃는 고통보다 내가 받을 불이익이 더 크게 보였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두 번째로 사랑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가장 최고로 사랑받고 아름답게 빛나야 마땅한 나의 존귀한 사랑.
“나 그래서 다시 생각해봤어. 이번엔 저번처럼 너가 소개팅하러 가기 전에, 내 곁에 아직 있을 때, 돌이킬 기회가 아직 확실히 남아 있을 때, 너가 헷갈리지 않게 분명하게 말해 주려 해. 있잖아. 나 앞으로 더 잘할게. 아버님께도 더 사랑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 너가 장거리 연애가 많이 힘들다고 한다면, 내가 이직도 고려해 볼게. 평생 너가 어디에 있던 그 자리가 곧 내가 있을 자리야. 그동안은 나와 너 사이에서 저울질했다면, 앞으로는 너를 위해 살고 싶어. 너가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나의 행복이었는데, 그것도 잊어버리고, 나를 위해 너를 포기하려 했다니. 멍청해도 정도가 있지…. 이미 많이 지쳤을 너에게 이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너만 괜찮다면. 한 번만…. 한 번만 더 나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까?”
말을 이어가는 와중에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기 두려워서, 나는 중간부턴 아예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이미 오랜 시간을 함께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나눈 우리였는데, 지금만큼은 어째서인지, 그녀의 대답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백하던 당시에도 이렇게 떨렸는지 모르겠다며, 한참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앞에서 귀엽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킁…. 정말이야? 정말 그만큼 나를 사랑해 줄 거야?”
“...물론, 내가 다른 걸 다 얻어도 너가 내 곁에 없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내가 쥐고 있는 걸 놓더라도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가 그렇게 말해준다면…. 나도 같은 마음이야. 사실 나도 오빠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결론이 이상하잖아! 우리 멀어져서 힘들어하는데 왜 헤어져. 오히려 결혼을 생각해 봐야 할 타이밍 아닐까? 근데…. 나 그 말을 꺼내면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오빠가 더욱 부담스러워할까 봐. 안 그래도 위험한 우리 관계가 더욱 흔들릴까 봐…. 그래서….”
“그러다가 우리가 진짜 헤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게…. 그래도 뭔가…. 뭔가 오빠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다고 생각했어. 헤헤 어쩌면 오빠라면 나를 계속 사랑해 줄 거라고 근거 없는 확신을 했을지도…?”
어쩌면 그녀는 현명한 처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계속 그녀와 나를 저울질 하는 상태인 채로, 우리가 이어졌다면, 그 관계는 서로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확신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거 같지만, 그래도 노력을 게을리 하진 않을거야.”
“...흥! 오빠 말 조심해야 해! 나 오늘 오빠가 한 말로 오빠가 내 말 안 들 때마다 평생 잔소리할 거다.”
“하하…. 앞으로는 조금이라도 잔소리 들을 일 자체가 없게 할게.”
“하여튼 말은 잘해요…. "
침울하던 분위기는 어디에 갔는지 둘 사이에 편안한 공기가 흘렀고 이제 그 자리엔 이별을 앞둔 커플이 아니라, 오랫만에 만난 애틋함을나누는장거리 커플만이 있을 뿐이었다.
온화한 날씨 속 다시금 품에 안은 그녀의 웃음이 내 가슴팍을 간지럽히고 우리는 마무리가 아닌,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기 위한 대화를 오랫동안 이어갔다. 어쩌면 그동안보다 더욱 바빠질 것이고 상황이 더욱 나빠질지도 몰랐지만, 이상하게도 새로운 충족감 탓에 미래가 두렵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