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회전(王子回傳)

왕자가 돌아온 이야기.

by 마타

“어젯밤 내 긴히 세자를 보고자 하여 세자의 침소에 들렸었다. 허나 세자는 자리에 없던데. 간밤에 어딜 다녀오는 길이더냐?”


“... 간밤에 말씀이십니까? 그저 밤공기가 선선하니 마음을 시원케 하기에 잠시 마실을 다녀왔을 뿐입니다.”


“...그러한가. 그것이 그저 마실일 뿐이던가.”

청색의 화려한 기와가 늘어선 넓디넓은 궁궐 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초겨울의 정원을 거닐던 왕은, 아들의 대답에 잠시 슬픈 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동안 침묵을 지키었다.

이 침묵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마 이 자리에서 그 의미가 가장 엄숙하게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의 아들, 세자일 것이다. 자신이 마음속에 숨기고 있는 은밀한 일들을 아버지가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것이 제일 궁금했을 테니까.


“...친우를 가려 사귀어라.”

“예?”


“친우를 가려 사귀라 하였다. 또 너를 믿지 말아라.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쉽게 흔들리기 마련, 무엇을 보고 듣는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그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여 그 안에 선한 것이 없는 법.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생각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다가는 군자가 될 수 없다.”

“...”


“왕은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왕의 행실은 온 백성이 지켜보고 있고 왕이 마음에 품은 생각에 따라 국운이 결정되는 것이니, 그 마음이 혼탁한 자에게 어찌 왕위를 물려줄 수 있겠는가?”

“?!”


세자는, 왕이 교훈을 이야기할 때는 가만히 있더니, 이어지는 왕의 말뜻을 이해하자마자 곧장 안색이 변하였다.

“그 말은 왕의 자리가 제 것이 아닐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내 교훈은 너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내가 가진 왕위는 너의 마음을 움직이더냐? 네 마음이 지금 옳으냐? 너는 마음을 스스로 살펴보아라. 겸손히 너 자신을 낮추어라. 네가 왕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라. 내가 너에게 이 말을 하는 목적이 너를 아끼기 때문임을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당혹감에 잿빛으로 변해버린 세자의 시야에, 왕의 진의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왕 앞에서 물러 나온 세자는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의 집무실로 달려가, 집기를 모조리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세자가 분노에 사로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불량한 친구들이 그에게 하나 둘 모여들었고 그들은 세자를 위로해 주었다.

“세자 전하께서는 무슨 연유가 있어 이리 화를 주체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아버지께서 글쎄 내가 왕의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더군. 하. 아들이라곤 나 하나뿐인데, 그럼 작은아버지께라도 왕위를 선양하실 생각이신가!”


“...그것이 무슨….”


세자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왕이 했던 모든 말을 미주알고주알 전해주었다. 특별히 왕이 친구들을 경계하라고 말했다는 부문에선 아무리 불량한 친구들이라 할지라도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버지께서 정말 나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실 것 같은가?”

“...”


대화의 흐름을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으나. 거기서 대놓고 왕의 의중을 함부로 예측하여 발언하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간밤에 세자와 함께 외출했던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폐하의 의견이 어떠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적법한 왕위 계승자를 내버려 두고 어찌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친족을 왕위에 앉히겠습니까? 그런 일은 주변국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시행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정통이 무너지면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법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다만, 아버지께서는 나의 행실을 문제 삼으시니….”


“그것이 무엇이 어쨌다는 말입니까? 이 나라의 주인이 되실 세자 전하께서 이 나라의 것을 미리 누린 것이 아닙니까? 이 나라의 왕위도 보화도 군사도 여인들도 모든 것의 전하의 것이 될 것이 아닙니까? 일반 백성들도 그 정도의 일탈을 하지 않은 경우가 없는데 이것으로 모범이 되지 못하니 왕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폐하께서 지나치신 것입니다. 세자 전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이 나라 백성들 모두를 벌하라 하시지요.”


왕의 발언에 대해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불경한 이야기였기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지만, 정작 가장 화를 내야 할 세자는 친구의 말이 퍽 감동적이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다 그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될 것인데, 오히려 일반 백성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나에게 들이댄다는 것은 심히 부적절한 일이지. 오히려 왕이라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라도 그 위세와 권세를 나타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나라의 국왕이 이 세상의 향락을 누리지도 못한다고 한다면, 주위 국가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오히려 어리석다 손가락질을 당할 것이야.”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 자가 왕이 된다면, 백성에게 오히려 무거운 짐만 잔뜩 지우지 않겠습니까? 저도 저의 왕으로서 그런 꽉 막힌 자가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좋은 정치는 백성에게 즐거운 마음을 안겨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향락의 즐거움도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백성의 마음을 즐겁게 해줄 정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는 세자 전하야말로 앞으로 모든 백성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어진 임금이 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구의 말에 세자는 집기를 다 때려 부술 만큼 넘실거리던 분노가 어느새 기쁨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치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달콤한 꿀송이처럼 어찌 그렇게 지친 마음을 훌륭히 위로하는 모사인지.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설령 왕의 생각과는 달리 세자가 왕이 되어야 백성이 행복할 수 있고 이번에는 왕이 예민하게 군거라 하더라도 상대는 분명 왕이였다. 법과 역사에 무어라 적혀있다 하더라도 그가 왕위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히면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왕은 그에게 행실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사실 세자는 충분히 조심하고 있었다. 왕이 되어 부와 권세를 부리며, 제 뜻대로 세상을 살아갈 그 순간만을 기다리면서 그는 왕위가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최대한 욕심을 눌러가며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왕위가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분노와 질투의 화마가 이성을 삼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자네의 말이 옳다고 해도 아버지께서 마음을 굳히시면 나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럼 제가 세자 전하를 믿고 한가지 충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자네의 말을 듣지 않고 또 누구의 말을 듣겠는가? 얼마든지 내게 말해보게.”


비록 아버지가 어울리지 말라고 했던 친구였지만, 그에 대한 세자의 신뢰는 굳건했다.

“폐하께서 왕위를 정말 세자 전하가 아닌 다른 분에게 넘기신다면, 이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에서도 우리나라를 아주 우습게 볼 것이고 어쩌면 그것을 빌미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정말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자 전하가 왕이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탐관오리들은 그 말만 듣고선 전하를 깎아내리기 위한 행동을 개시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


“이 모든 것은 세자 전하를 위해서, 또한 정의를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나라의 법도를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책임을 물어 일찍이 폐하께 왕위를 선위 받으시고 나라의 법도를 바로 세우소서! 저와 저의 집은 세자 전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병도, 군량도, 무기도 모두 세자 전하의 것이니 떨쳐 일어나 스스로 이 나라의 정상에 서시옵소서.”


친구의 조언, 그것은 바로 왕의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일으킬, 반란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심각한 표정으로 있던 세자는 한참을 생각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공할 확률은 어떻게 되지?”


자신의 아버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위를 얻을 가능성을 계산하는 세자의 모습.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기 전이었지만, 이미 대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폐하! 역모입니다!! 세자 전하께서 군을 일으켜 이곳으로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봉화를 올렸으니 곧 증원군이 도착할 것입니다. 일단 몸을 피하시고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뭣?! 그럴 리가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자가 역모라니!!”


늦은 시간에 들려온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소식에, 왕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아침까지만 해도 문안 인사를 주고받던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던 탓이리라.


“진실입니다. 폐하! 이미 세자께서는 군을 이끌고 왕제 저하의 가택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왕제의 집을?? 동생은 무사하더냐!!”


“예 다행히 군이 이르기 전에 소란을 눈치채시고 미리 몸을 피하셨다고 합니다. 현재 왕실 호위대에서 신변을 보호해 드리고 있습니다. ”


동생의 신변이 무사하다는 것에 한시름 놓는 것도 잠시. 세자가 왕제, 왕의 동생을 습격할 이유라고 한다면 단 하나였다. 바로 유사시 세자를 대신하여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상대를 제거하려는 목적. 만약 그렇다면, 세자의 다음 목표는 지금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은 자명했다.


“세자가…. 세자가 어찌….”


어리고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이렇게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왕위가 견고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 이 선택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인가. 세자가 어떤 연유로 여기까지 일을 벌였는가를 떠올려 보면, 아침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왕의 마음에 품은 생각에 따라 국운이 결정되는 것이니, 그 마음이 혼탁한 자에게 어찌 왕위를 물려줄 수 있겠는가?’


분명 그의 아들이 태어날 때만 해도 품속에서 배냇짓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뒤를 이어 현명하고 어진 임금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행복한 소망을 품었을 때도 있었지만, 그의 소망과 꿈은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역모의 정황이 명확하다면, 남아 있는 것은 내전뿐.


자신의 목을 노리고 다가오는 아들의 칼과 그 과정에서 흘려질 피, 그리고 남겨진 아들의 운명을 생각하니 왕은 비통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폐하 슬퍼하실 틈조차 없습니다. 폐하가 빠르게 옥체를 보전하셔야, 왕실 호위대도 증원군과 합류하여 새로운 방어진을 펼칠 수 있습니다. 속히 궁궐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다. 단지 나와 호위 병력이 먼저 궐을 빠져나갔다가는 소란 속에 궐 안의 사람들이 남겨질까 염려된다. 어서 어머니와 궁궐의 내인들, 궐에 남아 있는 학자들을 우선하여 피신시켜라. 나와 호위대는 가장 마지막으로 궐을 빠져나가겠다.”


“...! 예 전하!”


“...그리고 한 가지 더. 궐을 비우기 전에 황실의 보물고에 있는 금은보화와 옥새를 꺼내어 왕좌 곁에 두라고 전해주어라. 또한 양조장 관리는 궐에 남겨두고 반란군이 술을 요구하면 아낌없이 모두 내어주라 하여라.”



급작스러운 사태였지만, 왕의 진두지휘 아래, 궁 안 인원들의 탈출은 무사히 이루어졌다. 증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도성을 빠져나가는 왕의 행렬과 그것을 지켜보는 수도의 백성들, 그중 일부는 눈물을 훔치는 일도 있었지만, 근왕군을 이끌고 곧 돌아올 것이며 그때까지 반란군들에 저항하지 말고 목숨을 연명할 것을 부탁하는 왕의 부탁에 백성들은 왕을 믿고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왕의 어진 품성은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알려져서 도성의 백성은 왕의 설명을 믿어주었다. 왕을 잘 아는 일부 백성들의 경우는 반란군의 휘하에 남겨질 자신들의 운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뿐인 아들에게 배신당한 왕의 심정을 헤아리고 함께 슬퍼했을 정도였으니까.


마지막 왕의 행렬이 도성을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자와 반란군 무리는 곧 도성에 들이닥쳤다. 저항하지 않는 도성 수비대들을 거칠게 다루며 궐내로 들이닥친 그들은, 이미 거의 모든 인원이 빠져나가 텅 비어버린 궐내를 장악하며 성공적인 반정을 축하했다.


“세자 전하. 아니 폐하! 축하드립니다! 도성을 장악했으니, 이미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흠흠 아직 모르지 않나!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무리가 다들 무사히 도성을 빠져나갔다. 그들을 완전히 체포하기 전까진 마음을 놓을 순 없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세자 역시 입꼬리가 춤추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야 가장 먼저 장악한 왕의 집무실에서는 왕의 권력을 나타내는 옥새와 눈이 휘둥그레지는 양의 금은보화, 또한 왕실 양조장인이 만든 고급술까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선왕께서도 이 모든 것을 들고 가시려 창고에서 꺼내 놓으셨다가 시간이 촉박하여 그냥 떠나가신 것 같습니다. 이래서야 마치 세자 전하의 즉위를 축하하는 축하 선물과도 다를 바가 없군요. 이제 이 모든 것과 이 나라까지 모두 전하의 것입니다. 감축드립니다!”


“하하! 뭐, 다 나를 따라준 공들의 덕이 아니겠소. 어찌 이 모든 것이 나만의 것일 수가 있겠소. 당장 연회 준비를 합시다. 내 이 모든 것을 그대들과 함께 나누리다!”


집무실 가득한 금은보화와 고급 양조 술의 향내는 잔뜩 긴장해 있던 초보 반란군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이미 무기는 한쪽에 치워버린 채 그들이 긴장을 풀고 있으려니 궐내 장악을 나섰던 반란군의 장수 중 한 사람이 집무실로 들어와 그들에게 보고를 올렸다.


“세자 전하. 아니, 폐하! 궐 안의 장악을 완료했습니다. 남아 있던 도성 수비대들도 대부분은 성문을 여닫거나 통금을 수행하는 일부 병력에 불과해 그들 역시 모두 생포했습니다. 곧바로 추격조를 편성해 선왕의 체포에 나서겠습니다.”


“음? 아 그거 어차피 이 야밤에 그 많은 인원이 어디에서 몸을 숨기겠나. 우리 군사들도 힘이 많이 들었을 텐데, 오늘만큼은 좀 쉬도록 하지.”


잦은 군사 경험이 있던 베테랑 군인이야 모르겠지만, 세자로서는 처음으로 군을 동원해 왕제 저택의 호위 병력 및 일부 도성 경비대와 교전을 벌여 –전투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었지만- 도성까지 장악한 것이었다.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머리가 잔뜩 흥분되어 지끈거릴 지경이었는데 금은보화와 술을 눈앞에 두고 어두운 밤에 다시금 교전을 치르러 출전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병사들의 피로도 고려해야 어진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괜히 야밤에 난전을 벌여 각개격파 당할 위험을 감수하자니 날이 밝고 추격을 해도 늦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왕 폐하께서는 도성 경비대와 왕실 호위대 병력 대다수를 보존하신 채로 성을 나서셨습니다. 그들이 전열을 추스르지 못하는 지금 이때, 그들을 쳐서 와해시켜야 합니다. 오히려 각지에서 증원군이 도착한다면 포위 섬멸을 당하는 것은 우리일 것입니다!”


“...흠 그러한가?”


무관의 진언에 약간 흔들리는 듯한 세자였지만, 그의 옆에 있던 간신 친구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것은 적군과 싸울 때야 먹히는 논리입니다. 보십시오. 이 궁이 지금 누구의 손에 있습니까? 이 나라의 보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옥새가 누구의 앞에 있습니까? 지방의 관리들이 궐에서 쫓겨난 선왕의 뒤를 따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역의 유지일 뿐 선왕의 변견이 아니니까요. 저 왕실 호위대와 도성 경비대 인원들이 저쪽의 모든 패일 것입니다. 그저 현 체제와 관리들의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방을 써서 붙이십시오.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들었나? 그러니 병사들을 쉬게 하고 전국에 포고문을 돌리게, 그리고 우리가 들어올 때 저항했던 도성 경비대 중에 가장 직위가 높은 3명의 목을 베어 도성 앞에 내걸어 백성과 군의 법도를 바로 세우게.”


“...!! 그것은…. 그들은 직무를 다했을 뿐으로 저희가 맞닥뜨린 저항은 명령을 듣지 못한 몇몇 병사들의 개인적인 저항일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목을 벤다면 도성 내의 조직적인 저항이….”


“무관! 그대가 어찌 정무에 관여하려 하는가? 명령에 따르게. 그게 군인의 일이 아니겠나? 보고가 끝났으면 어서 나가보게.”


“...예 전하.”


무관의 보고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은 집무실 한편에 그득히 쌓인 술통의 뚜껑을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집무실을 가득 채우는 고급 발효주의 향기들. 그리고 그런 광경을 바라보던 무관은 그대로 집무실을 떠나 세자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고 그대로 도성을 떠나버렸다. 저 꼴을 보아하니 이 사태의 결말이 이미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도성을 빠져나간 왕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각 지역의 근왕병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지역의 관리들이 왕에게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왕과 그 신하들이 건재한 와중에 명분도 성과도 없는 반란에 동참할 만큼 지역의 유지들이 바보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선왕의 어짊에 관한 이야기는 지방에까지 퍼져 있어서 반란군을 돕기 위해 병력을 차출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민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왕의 병력은 늘어나고 왕권 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 속, 세자의 병력은 하나둘 자리를 이탈하는 상황.


이윽고 왕은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도성을 포위하고 궁궐을 향해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도성 수비대의 장수들이 까닭도 없이 반란군에게 처형을 당해 목이 내걸린 것이 바로 얼마 전 일이었다. 당연히 백성들과 도성 수비대에게 항전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곧 도성의 굳건한 성벽들은 하나둘 무너져 내렸다. 끝내 버티지 못한 반란군 세력은 곧 무너질 도성에서 철수해, 궁을 주변으로 방어선을 펼쳤고 승기를 잡은 왕은 더는 병사들의 희생을 치르고 싶지는 않다며 궁과 아직 점령하지 못한 요새 몇 곳을 그저 포위만 한 채, 반란군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완전히 봉쇄했다.


추운 겨울날, 다시금 며칠이 지났다.




포격으로 무너져 내린 천장 틈 사이로 한겨울의 냉기가 쏟아져 들어왔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왕의 위엄을 나타내며 어전회의가 진행되어야 할 어전에는 세자와 역모에 동의했던 일부 간신 친구들만이 남아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기뻐하던 왕실의 금은보화는 서리가 내려앉은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던 왕실 장인의 술병들은 이미 다 마셔버려 그들의 몸조차 데워 주지 못하고 있었다.

“...매우 곤하구나. 여봐라!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건물을 찾아보라 하지 않았더냐?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그것이 건물은 찾아보고 있사오나. 사실 궐내의 장작이 몇 남지 않았습니다. 군사용으로 전투 시에 쓸 것을 제외하면, 지금 이 궐내에서 난방용으로 쓸 수 있는 장작은 사실상 없습니다.”


“... 한 나라의 왕실을 따뜻게 할 장작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여기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이 이 나라 왕실의 금은과 보화다! 장작을 하러 나갈 수가 없으면 시장에서 사 오든 역군을 동원하든 하란 말이다!!”

“...아시다시피 이미 부왕께서 궐을 포위하신 지 오래인지라…. 금은과 보화는 불에 타지 않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장작으로도 쓸 수 없는 것들입니다.”


쾅!!


무관의 비아냥인지 자조 섞인 말일지 모를 푸념에 세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분을 참지 못하고 크게 발을 굴렀다.


“그대들은 어째서 얼마 전부터 입을 열지 못하는 거요! 내게 역모를 부추긴 것은 당신들이 아니었소?! 설마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내게 이 일을 해결할 방도를 가져오란 말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세자 전하께 끝까지 의리를 지켜드렸습니다. 여태까지 피를 흘린 군병 중 세자 전하의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단 말입니까? 저희는 세자 전하를 따라서 여기까지 왔는데 인제 와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허. 그때 그대들의 병력 모두가 곧 나의 것이라며, 나를 부추기던 그 잘난 혓바닥으로 이제는 나에게 책임을 떠넘긴단 말이오?”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동안 궐이 포위될 동안 제대로 된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계속 패배만 하신 것은 전적으로 군을 지휘하신 세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사실상 저희는 피해만을 보았습니다!”

“됐어! 듣기 싫소. 우리끼리 싸워서 무엇하겠소. 정말, 이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 목을 베어 부왕께 찾아가 용서를 빌지 그러오? 운이 좋다면 역적을 처단한 의인으로서 역사에 기록되어 오히려 상을 받을 수 있게 될지 혹시 아오?”


모든 것을 잃은 세자의 통렬한 비웃음에 어전에는 침묵이 돌았다. 세자의 말대로 될 리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의 모두에게 확정된 미래는, 역모를 꾸민 역적으로서 모든 것을 잃고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우리에게 이 일을 가장 적극적으로 권유했던 우리들의 참모가 보이지 않는구려. 그 친구는 혹시 지금 어디에 있소?”


“...전하 소식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소식?”


“그 작자. 궐이 포위되자마자 가장 먼저 포위망 바깥으로 나가 부왕께 우리 군의 배치도와 식량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부왕의 군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영내에 진입하지 않는 것도 우리의 식량 사정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며칠이면 추운 겨울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릴 텐데 굳이 싸움을 걸어올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뒤로 며칠이 지났을까? 그 말을 들은 세자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든 끝까지 발버둥을 쳐보려던 모든 시도도 끝이 나고 저항의 의지를 잃은 채 찬 바람이 쏟아지는 어전에서 웅크려 지내길 수일.


반란군의 사기도 완전히 무너져 내려, 이 정도면 추위와 굶주림에 죽기를 기다린다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였다. 그렇게 궐 내에 을씨년스러운 침묵만이 흐르던 그때, 적막을 깨고 때아닌 소란스러움이 궐내를 흔들었다.

반란군의 힘이 다 빠지길 기다렸던 왕실 호위대와의 교전이 다시금 시작된 것일까?

이제 왕권에 대한 욕심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피어올랐던 혈기도, 모두 사라지고 그저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만을 느끼던 세자는 이제 자신에게 최후가 다가온 것을 직감하고 기다시피 왕좌에서 내려와 서둘러 바깥의 사람들을 찾았다.


“여…. 여봐라!! 이게 무슨 소란이더냐!! 드디어 왕실 호위대가 공격을 시작한 것이더냐!!”

“세…. 세자 전하 그것이 아니라…. 부왕께서 사신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세자 전하와의 독대를 요청하고 있어서 소란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 아버지께서 내게 사신을?”


이제 와서 사신이라니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세자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복이라도 권유하시려는 것일까? 그렇지만, 역모는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역모를 모의한 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는데 하물며 그것에 동참한다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줄줄이 사형을 당해도 모자란 죄였다. 항복과 전투의 결과가 똑같이 죽음이라면 항복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오히려 차라리 빨리 이 싸움의 끝을 내주는 것이 왕이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자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그에게 사신을 보내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솔직히 이 와중에 아버지의 사신을 만나 이 처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 특별한 수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식량 사정이나 부대 배치 같은 기밀 사항이 다 넘어갔다면, 인제 와서 사신이 이곳의 사정과 군사 기밀들을 빼내어 갈 것을 염려하는 것도 무의미했으니까.


“...들라 하라. 어차피 이대로는 마지막인 듯싶으니 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세자는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다 무너져 가는 어전으로 들어가 다시금 빛이 바랜 왕좌 위에 앉았다.

처음만 해도 세자는 분명 바라던 모든 것을 손에 얻었었다. 이 나라 권세의 상징인 옥새도, 금은보화도, 듣기 좋은 소리만 해주던 친구들도, 도성의 아리따운 여인들도, 왕만이 즐길 수 있는 온갖 산해진미들도. 그러나 결국, 여인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갔고 친구들은 그를 배신하는 것에 앞장섰으며 옥새와 금은보화는 무너진 기왓장 사이에 깔려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산해진미는커녕 자신의 몸 하나 데울 장작 한 조각조차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허울뿐인 왕좌에 앉아 있으려니 세자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크…크킄킄 내 꼴이 재밌지 않은가? 결국 아버지의 간섭을 떠나 내 멋대로 해보겠다고 벌여본 일의 결과가 결국은 이 꼴이란 말인가? 스스로는 하루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내 실상이라니, 스스로 모든 것을 얻고자 했으나 이제는 내 생명조차 보존할 수 없게 되었으니.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허울뿐인 왕좌와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돈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내 배를 채우지 못하고 왕위와 군사가 내게 있으나 내 생명을 구하지 못하는구나!”

모두가 그의 곁을 떠나고 오랜 굶주림 끝에 처음으로 내뱉은 세자의 후회였다. 그러나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기에 세자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다가올 죽음을 떠올리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전하. 사신 분이 곧 들어오십니다.”


안쪽의 세자의 흐느낌은 바깥에서도 들렸는지, 어전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사신의 당도를 알려 주었다.

“...들라 하여라.”


사신은 왕의 측근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한 신하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항복이나 자결을 요구하는 왕의 편지가 아니라 쟁반과 함께 오지그릇 하나가 들려 있을 뿐이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보아하니 부왕의 서신을 들고 오신 것은 아니신 것 같은데. 제 꼴을 보고 저를 비웃기라도 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아버님께서 제게 자결을 종용하시면서 사약이라도 내리신 겁니까? 안 그래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이라도 곱다고 마지막은 그 약으로 배불리 죽을 수는 있겠군요. 역모자의 마지막까지 배려하시니 과연 부왕은 성군이십니다.”

“... 아비의 마음은 자녀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법이지요. 어디에나 있는 저 흔한 소작농에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모든 부모의 비애가 아니겠습니까? 세자께서 아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려 하셨다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다만,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는 것을 알기에 저는 그저 이것만을 전해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부왕께서 친히 하사하신 것이니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다 드시는 것이 왕실의 질서와 부왕의 선의를 헤아려 드리는 효가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런 말이었다. 역적으로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스스로 삶을 정리할 기회를 주겠다는 뜻. 아마 부왕의 마지막 선의겠지.


“하. 어련하시겠습니까. 비록 불효막심한 이 아들놈은 먼저 세상을 떠나지만, 아버지께서는 꼭 천수를 누리셔서 왕위를 공고히 하시길 바란다고 꼭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보내주신 것도 성은에 망극해 하였다고 전해 주십쇼.”


그렇게 말한 세자는 그 늙은 신하의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와 오지그릇의 뚜껑을 열었고

그 안에는 추운 겨울날임에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숙 한 그릇이 들어 있었다.

“세자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아들의 위협에도, 부왕께선 하루도 잊지 않고 자식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음을, 폐허가 된 궁궐에서 더는 불을 지피는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것을 보시고는 세자께서 추위와 굶주림에 몸이 상하시진 않을까 애달파 하셨다는 것을, 무엇보다 이대로 가면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통곡하셨다는 것을.”


“...”


너무도 뜻밖의 선물에 세자가 말문이 막혀 있으려니 늙은 신하는 세자의 손에 쟁반을 쥐여주고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부왕께서는 다른 말은 없으셨습니다. 그저 욕심에 눈이 멀어 아비의 목에 칼을 들이댄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있을 자신의 자식이 한 끼 밥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하는 것이 부왕의 마음이겠지요. 어쩌면 부왕은 자신이 왕이 아니고 자신을 따르는 백성이 없었다면, 차라리 세자의 반란이 성공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왕을 오랫동안 모셔왔던 저이지만, 왕의 저런 모습은 저도 처음 보니 말입니다.”




“폐하!!! 폐하!!!!!”


늙은 신하가 떠나간 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감정을 추스르던 세자는, 곧 그토록 원하던 왕좌와 금은보화를 내버려 두고 궐 밖으로 뛰쳐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를 잡기 위해 진을 치고 대기하던 왕실 호위대의 깃발과 총칼을 든 병사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는 죽음의 두려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 죗값은 다 치르겠다!! 그러니 폐하를 한 번만 뵙게 해다오!! 폐하!!! 폐하!! 부디 제 목소리를 들으시고 한 번만 저에게 그 존안을 비춰주소서!! 폐하!! 폐하!!!!”


총칼을 든 병사들이 두렵지도 않은지 호위대의 진 한가운데로 향한 그는 아버지의 기가 높이 솟아 있는 천막을 발견하고 그 즉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어, 기면서 그의 아버지를 불렀다. 이전에는 아버지와 함께 머물던 그 깃발 아래, 그러나 지금 그 앞에 나아간다면, 아들이 아닌 역적으로서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폐하!!! 내 주여!! 불충한 대역죄인이 하는 수 없어 두 손 들고 내 주를 뵈러 나왔나이다!! 저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도 없는 자이옵니다. 오히려 이 자리에 주와 함께 있는 주의 종들의 발을 씻기기에도 한참 모자란 자입니다. 주께서 지금 당장 저를 이 자리에서 쳐 죽이셔도 할 말은 없으나 부디 내 주의 곁에서, 내 주의 품에서, 내 주의 손에 죽게 하여 주십시오!!!”


목청이 터져라, 이마가 땅에 짓이겨져 피가 터져 나오는 와중에도 머리를 땅에 찧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무릎을 꿇은 채 왕의 기 앞으로 나아간 세자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왕과 그 대신들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저는 어리석었습니다! 저는 제게 없는 것들을 바라보며 제가 스스로 왕이 되어 살리라 다짐했지만, 사실 제가 누리던 그 모든 것은 폐하께서 제게 하사하신 것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꿈꾸던 모든 것을 얻고 맛보았지만, 세상의 부귀영화란 정말 덧없는 것이어서 하룻밤 사이에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허망한 것이 저의 만족이 되어줄 줄 알았으나, 제가 좋다고 여긴 모든 것들은, 사실 좋으신 아버지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제가 추구해야 할 것은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였는데!! 아버지의 사랑이고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는데!! 저는 가장 중요한 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와 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내 욕심을 더욱 사랑하여 내 주의 품을 떠났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한탄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몇 번이고 머리를 땅에 부딪히며 세자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제 불충한 종이 주의 앞에 있으니 주의 뜻대로 좋을 대로 제게 하시옵소서. 어떤 심판도 달게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저 한 가지. 앞으로 내가 아버지의 손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주의 곁에서 죽기 원합니다. 주를 떠나 범죄한 저이지만, 이젠 죽는 그 순간까지 주의 곁을 떠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 목숨의 끝은 주의 곁에서, 주의 손으로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


세자의 비통한 울음소리에 좌우간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왕의 발걸음이 세자에게로 향했다. 아마 자신의 소원대로 친히 죽음을 하사하러 오시는 것이리라. 두려움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자신은 죽어 마땅한 자였다. 오히려 병사들의 총칼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에 삶을 마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했다. 발소리가 자신의 앞에 멈추고 세자가 눈을 감는 순간. 그의 등에서 느껴지는 것은 차가운 금속이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였다.


“...됐다. 내 어찌 너를 내 손으로 죽이겠는가. 오히려 내 마음은 기쁘다. 오늘은 잃었던 아들을 찾았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난 날이다. 잔치를 벌여 마땅하지 않겠는가! 네가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이렇게 내게 나아왔는데, 나 역시 너의 평생에 너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너를 내 품에 품고 내 손에 세기고 밤낮으로 너를 위할 것이다.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라. 오늘은 좋은 날이다.”


고개를 든 세자의 눈에는, 승리자여야 할 왕의, 수척한 얼굴이 들어왔다. 붉게 물든 퀭한 눈동자에선 눈물이 쏟아졌고 수척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땅을 적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세자가 돌아온 것이 그렇게나 기뻤는지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여봐라 오늘은 기나긴 고통이 끝난 날이다. 역모에 가담했던 모든 병사를 사면할 것이다! 또한, 오늘 이후로 이 일은 나와 이 나라의 기억에서 영원히 묻을 것이다! 단지, 내 아들을 꾀어 내 앞에서 이 아들을 참소했던 그 원수는 도성 밖으로 끌어내어 쳐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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