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와 해방 사이에서
성은 욕망이고 모든 계층은 성을 소비하는 고유의 관습을 갖는다. 70년대 말 페미니스트들을 뜨겁게 달궜던 이른바 '성 전쟁(sex war)'은 크게 세 가지 관습을 논쟁 지점으로 부각했는데, 포르노, BDSM, 성매매가 그것이다. 성매매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여전히 기만적이고 첨예한 한편, 포르노는 다루는 소재나 생산환경 등으로 주된 논점이 이동하여 윤리적 소비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간 듯하며, BDSM의 경우 아예 기존의 담론들 자체가 그다지 타당하지 않았음을 밝히면서 담론전이 해소된 모양새다.
그 나라를 알려면 그 나라 사람과 자 봐야 한다던 어느 철학자의 말은 조금 과장되었을지라도 여행에서 그 나라의 성문화를 아예 읽어낼 수 없다면 아쉬울 것이다. 2017년 교토의 네네노미치 근처에서 커플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만 우산을 쓰던 일본인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키하바라의 포르노 매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충격에 비하면 그건 별 일도 아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에 빽빽이 가득 찬 AV DVD는 둘째 치고, 3미터 간격마다 볼륨을 높여 상영되던 AV 샘플은 성은 과잉되는 순간 유혹하는 힘을 잃어버림을 보여주는 교과서 같았다.
일본인의 성 소비 관습이 우리와 다름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소 중 하나가 중고 포르노 잡지 서점이다. 일본 서점의 성지인 진보초 역 근방에는 도서 애호가라면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많은 서점과 헌책방이 늘어서 있는데, 특히 헌책방들의 경우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대부분이 각각의 분명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우키요에, 고서, 그림책, 음악 잡지 등 다양한 메이저 장르들이 버티고 선 사이에는 포르노 잡지 및 화보 전문 서점들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규모나 특화 부분에서 눈여겨볼만한 곳이 진보초역 A7 출구 근처의 아라타마 서점 본점이다.
크고 높은 건물들 사이에 끼여있어 자칫 지나치기 쉬운 천하일 제2빌딩 2층에 아라타마 서점 본점이 있다. 작고 냉담한 철문을 열자마자 닥쳐오는 검정과 핑크로 가득 찬 책장에 긴장하는 것도 잠시, 조금만 지나면 여느 헌책방과 딱히 다를 것도 없는 차분한 분위기에 곧 적응하게 된다. 2020년 겨울 찾아갔을 때 만난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알바 분은 수려한 외모에 목소리도 좋으셨는데, 응객도 무척 담담하고 친절하여 묘하게 서점 자체가 인간으로 화한 느낌이었다.
아라타마 본점은 소프트한 누드 화보 및 아이돌 관련 상품을 다루는 인근의 신점(新店)과는 달리, 더 본격적인 포르노 화보 및 BDSM 잡지를 판매한다. 각 잡지의 역사를 알지 못해 단언할 수는 없으나 80~90년대 출판된 도서가 주요 취급품목인 것으로 보인다. 상품 '특성'상 도서들은 비닐로 포장되어 있어 그 자리에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미리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내점 한 것이 아니라면 표지에 구매의사를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데, 포르노 상품 자체가 대부분 겉포장만을 보고 구입하는 성격이 있음을 고려하면 한계라 말하기도 애매하다. 아라타마 서점 본점의 진정한 '문제'라면 '남성 신체'를 다루는 매체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이곳 역시 여성의 성적 대상화라는 오래된 문제제기를 벗어나긴 어렵다.
BDSM이 묘하게 지적인 속성을 띠는 것은 그 인위성과 연극성에 기인한 것이리라. 전적으로 평등할 수밖에 없는 사이에서 지배와 피지배를 설득력 있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연출하지만 정작 그 주도권은 언제라도 연극을 끝낼 '피학대자'에게 있다는 것, 극한을 추구하면 할수록 기존 연애성각본에서 멀어져 성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객체까지를 포섭한다는 것. 가부장제/삽입자 중심의 젠더 레짐 하에서 소외된 주체성을 호출하는 이런 특징들이 BDSM을 페미니즘과 레즈비어니즘의 주요 의제로, 성평등을 고민하는 이들의 성애 양상으로 만든 측면이 있다. 단순히 지능과 성적 상상력이 비례한다는 연구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그래서인가 BDSM과 헌책방의 만남은 서로 무척 잘 어울리는 한편으로, 황당할 정도로 옛날식 혁명을 연상시킨다. 통상적인 성의 소비 방식을 거부하면서도 낡은 문화가 재 소비되는, 벗어나고 싶지만 거절하기도 어려운 모순되고 난해한 공간. 헌 책과 BDSM이라는 지성적이고 우아한 미감이 싸구려 포르노를 소비함으로써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죄책감과 맞부딪치는 곳. 아직 새로운 젠더 윤리가 우리에게 도달하기 전의 혼란이 아라타마 서점 본점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당신이 소위 SMer라면, 그렇지 않더라도 성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거나 성표현물에 거부감이 없다면 아라타마 서점은 한국인 여행객에게 꼭 추천하고픈 곳이다. 유난히 중산층 이하 계층의 성 소비에 엄격한 나라 사람으로서 이 이상의 자기 객관화 경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신이 책을 좋아한다면 복잡한 이유를 따질 것 없이, 일어를 잘하지 못함에도 도쿄에서 들를 수 있는 서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울 일 아니겠는가. 딸기주스와 피자토스트로 유명한 카페인 "사보루2"가 바로 옆에 있으니 겸사겸사 핑계 대며 들르기에도 무난할 테고. 성의 표현 방식이 시대에 따라 변하며 우리의 성욕도 이에 맞춰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의 실제 내용을, 아마도 이곳에서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라타마 서점 본점(荒魂書店本店)
매일 11:00~19:00
연말연시 휴무 (홈페이지 참고)
홈페이지 : http://www.aratama.com/index.html
위치 : 일본 〒101-0051 Tokyo, Chiyoda City, Kanda Jinbōchō, 1-chōme−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