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무사시코가네이 역은 도쿄 관광객이 거의 고려하지 않을 선택이다. 역 인근은 한국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삭막한 상점가와 아파트 단지가 늘어서 있는데, 금지된 2000년대에 발을 들여놨다 저주를 받아 멈춰버린 것 같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시대'의 일본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장소다. 북쪽의 에도도쿄 건축정원은 유미주의자들이나 건축학도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있으나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고, 인근의 라멘 가게들은 평점은 좋지만 현지인들과 줄 서기 경쟁을 하고서는 쉬이 식사를 해결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문구류 애호가라면, 더군다나 80~90년대의 문구에 대한 확고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면 60년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노포(老舗) 나카무라 문구점은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첫째, 다른 '레트로' 문구점이 새롭게 해석된 레트로 풍 문구를 중심으로 다루는 반면, 나카무라 문구점의 주 품목은 말 그대로 과거의 문구다. 오랫동안 선택받지 못해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는 노트와 수첩, 스테이플러와 펀치, 스티커라 부르면 어쩐지 '저요?'하고 반문할 것 같은 견출지까지 옛날 물건들이 가득하다. 진열된 상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문구류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전통을 조금씩 비틀고 이어받았는지 그 기원을 엿보는 느낌이다.
둘째, 나카무라 문구점의 사장님이 복고풍 문구류 '덕후'다. 수입도 많지 않은 데다, 재개발 대상이 되어 철거 위기에 놓은 문방구를 장소를 옮겨가며까지 재개장했으니 오죽하겠는가. 진열된 문구류들의 나이나 관리 상태, 분류된 모양새만 봐도 그의 열정이 느껴진다. 부러 한국에서 찾아왔다고 말하니 같은 애호가로서 연필 하나를 슬쩍 끼워 넣어주는 센스도 있다. 나는 아쉽게도 얼굴 표정과 몸짓 발짓밖에는 나눌 수 없었지만, 일본어를 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이라면 사장님과 여러 대화가 오갈 법하다.
셋째, 한국과 일본 모두 레트로 혹은 뉴트로가 유행한 후 옛 것을 좋아하는 진퉁 '진지충'들이 갈 곳을 많이 잃었다. 그 와중에 이 나카무라 문구점은 고아함과 고즈넉함, 그리고 어딘가 모를 수더분함을 모두 갖춘 채 살아남은 정말 옛날의 상점이다. 오래된 나무의 중후한 색감에 80년대가 느껴지는 '미장센'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이나 젊은 힙스터들이 우르르 몰려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점수를 주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오직 문구류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곳까지 찾아가 봤다는 그 약간의 불결하고 오만한 쾌락도 즐길 수 있을 테고.
본인이 정말 옛날 문구에서 미감을 느끼지 못하고 약간의 취향만 있을 뿐이라면 나카무라 문구점은 추천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게 나카무라 문구점이 취급하는 문구는 방구석 어딘가, 어릴 적 학교 어딘가에서 봤을 법한 아이템의 연속일 뿐이다. 또한 간단한 연필이나 노트 등이 아니라 누가 봐도 예쁘다 말할 만한, 서서히 골동품이 되어가는 단계의 펀치나 펜 같은 경우 헉 소리 나는 가격을 자랑한다. 굳이 멀리까지 찾아왔으니 지갑을 열 생각이라면, 오천 엔이나 만 엔짜리가 나갈 각오는 미리 해 두는 것이 좋다.
나카무라 문구점은 주말 오후와 저녁에만 문을 연다. 도쿄 전철 츄오센을 타고 무사시 코가네이 역에 내려 남문을 벗어나 5~10분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 큰길에서 골목으로 막 접어드는 입구에 위치해 있다. 2018년 겨울 방문했을 때는 눈에 잘 띄지 않아 한참을 헤맨 후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갑자기 학교나 공원이 나올법한 휑한 길가에 놓여있는 데다, 존재를 확인할만한 어떤 특별한 광고물도 없기에 위치를 미리 잘 파악하고 찾아가는 것이 좋다. 여행객이 그 좋은 주말에 굳이 이곳을 가려 마음먹었을 정도라면 당연히 채비를 단단히 할 테지만.
처음 이곳을 찾아갔을 때 주인장이 "한국엔 이런 곳이 없나요?"하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인은 자기가 운영하는 문구점을 흔한 오래된 문방구 중 하나라 생각했던 것 같다. 언어 능력의 부족으로 굳이 타국에서 이런 곳까지 와야 하나 하는 그의 호기심에 제대로 된 답을 주지는 못했다. 혹시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내가 여행비를 써가며 방문했을까 반성한 적도 있다. 애초에 이곳이 그런 곳이다. 언젠가 지나왔을 평범한 옛 시간이 낯설게 느껴지는. 혹시 우리 주위에 있지나 않을지, 나의 미감이 허세에 차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나카무라 문구점(中村文具店)
주말 12:00~20:00
평일 휴무 (홈페이지 참고)
홈페이지 : https://nakamura-bun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