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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뻬릴 Jul 05. 2021

무너진 체제의 조그만 유산들

비스킷(Biscuit), 도쿄 다이토구

언덕 위로 맑은 햇살이 내리쬐는 도쿄 다이토구의 서쪽으로는 오래된 건물과 사찰이 고아한 아취를 빼곡히 뽐낸다. 닛포리역, 센다기역, 네즈역 일대인데, 근 몇 년 사이 관광지로 집중 조영 되면서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 지역을 찾고 있다. 일본 여행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야나카긴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로를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는 닛포리 역을 서편으로 나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시장가 아케이드 특유의 '대문'이 나타난다. 인근의 고양이 마을 덕분에 더욱 명성을 얻은 야나카긴자의 점포들은 많은 수가 앉은뱅이 의자를 꺼내놓고 있는데, 지나가다 잔술에 간단한 음식을 곁들이기 적당하다. 익숙하면서도 이채로운 정경에 아무 데서나 사진을 찍어도 그럴싸한, 하지만 그렇기에 방송국 촬영 스태프나 관광객들의 방해를 무시로 받아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야나카긴자가 끝나는 지점 즈음 나타나는 대로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틀면 센다기와 네즈를 둘러볼 수 있다. 언젠가 어릴 적에 지나쳐온 것만 같은, 하지만 실제로는 방문한 적 없는 장소가 주는 기이한 노스탤지어. 오래된 건물 사이로 나무와 꽃들이 종종 색채를 더하고, 언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묘하게 더 친절하게만 느껴진다. 이곳의 골목골목에는 작고 잘 다듬어진 보석 같은 가게가 참 많이도 숨겨져 있다. 그중에서 특별히 소개하고자 하는 곳이 공산권 레트로 문구점·빈티지 소품숍비스킷(Biscuit)이다.


쇼와 시대 분위기 속으로 갑자기 침입한 공산주의(5th Feb. 2020)


비스킷에서는 메달, 배지, 엽서, 인형, 동화책을 비롯해 다양한 상품을 취급한다. 이 물건들 중 많은 수가 구 공산권 출신이다. 일부는 통일 전 동독에서, 일부는 체코 등 동유럽에서, 또 일부는 무너지기 전 소련에서 만들어졌거나 여하한 사연으로 그 국가들에 잠시 머물렀다가 일본의 한 작은 가게까지 흘러든 것이다. 대부분은 80년대에 생산된 물건들이나 때로는 그보다도 훌쩍 나이가 많은 아이템이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 주고받았던 마음이 채 지워지지 않은 중고 엽서들이 특히 그러한데, 수십 년 전 어느 유럽 국가의 소인이 찍혀있는 경우도 흔하다. 옛날 사람의 손때가 묻은 엽서나 책, 한 때는 명예를 담고 귀중하게 여겨졌을 메달을 구경하다 보면 죄책감과 의문이 같이 찾아오기도 한다. 만약 공산주의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이 나라의 사람들이 급작스레 가난해지지 않았다면 이 물건들을 여기서 마음껏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었을까 하는. 


비스킷을 들르는 손님의 극소수는 (현실)공산주의에 이상한 호감과 호기심을 갖춘 사람이겠지만, 대부분은 동유럽 레트로 특유의 미감에 매혹되었거나 특이한 소품을 찾는 이들일 것이다. 과거의 공산권 유럽 국가라는 것이 자유서방진영의 첨병 노릇을 했던 한국과 일본 국민들에게는 봉쇄된 철벽 너머의 환상에 불과하기에, 비스킷에서 행해지는 소비 행태란 붕괴한 체제의 "비인간 행위자"들을 키치적으로 대상화하여 희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모든 쇼핑이 그런 속성을 일부는 가지고 있을 테니 조금은 스스로를 기만하기로 하자. 비스킷의 상품들은 그 정도의 소소한 위선을 정당화할 정도로는 충분히 귀엽고 예쁘다.


비스킷 홈페이지를 참고하자면 최근에는 영국이나 덴마크 등 북유럽 빈티지 소품 비중이 상대적으로 늘어난 것 같다. 비스킷은 정해진 쉬는 날 없이, 일본 대부분 상점의 영업시간인 11시~18시에 문을 연다. 적당히 인근 지역을 산책도 하고 사진도 찍다가 들러서 쇼핑 후 점심을 해결하기 좋다. 밤의 네즈와 야나카는 고즈넉하고 쓸쓸하기에, 감상에 수이 젖어드는 여행객이라면 우울을 피해 볕이 좋은 낮에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어떤 품목을 주로 다루고 있는지 미리 확인할 수 있고, 능력자라면 굳이 직접 찾아갈 것 없이 웹샵을 이용해 온라인으로 원하는 물건을 구매할 수도 있겠다. 당신이 레트로 문구나 액세서리, 장난감에 큰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공주의 레짐 속에서 공산주의 유럽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한국인이라면, 먼 나라의 오래전 물건들에 잠깐 감각을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일 축하 카드부터 직물공장 여성노동자 배지까지(29th Dec. 2020)




비스킷(Biscuit)

매일 11:00~18:00

연중무휴 (악천후나 재난 시 휴무 가능)

홈페이지 : http://biscuit.co.jp/webshop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biscuit_yanaka

위치 : 2-chōme-9-14 Yanaka, Taito City, Tokyo 110-0001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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