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할수록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평범한 초등학생이던 렌의 엄마 아빠가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빠가 이사를 가기 전 마지막 식사에서 애써 분위기를 띄우려 조잘조잘 말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엄마와 아빠는 묵묵부답. 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렌의 엄마 아빠는 이혼을 결심했다.
소마이 신지의 1993년작 <이사>는 초등학생 렌(렌코)이 부모님의 별거를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부모님의 이혼과 그에 따른 아이들의 혼란을 그리는 이야기는 많지만, <이사>가 다른 이혼을 다룬 이야기와는 조금 달라 보이는 이유는 영화가 좀처럼 겉으로 보여주지 않는 주인공 렌의 심리를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전개 방식에 있다.
렌은 같은 반 아이들보다 훨씬 작은 체구임에도 또래보다 성숙한 사고를 가진 아이이다. 그러면서도 물리적으로 경험이 부족하므로, 렌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른의 삶’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렌은 자신과 외부(부모님의 이혼)와의 갈등을 겪는 동시에, 성숙하고 싶은 이상 속의 자신과 성숙하지 못한 현실의 간극 속에서 내면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영화가 렌이라는 인물을 어린아이가 아닌 한 사람으로 존중하여 보여준다는 단서는 렌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의 방식에 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렌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부모님의 결별 또한 자연스럽게 렌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되어 있다. 심지어 아빠가 사무실에서 렌이 건 전화를 받는 장면에서조차 렌은 집요하게 스크린 한구석을 차지한다.
스크린 속 제1의 인물, 렌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장치 중 하나는 러닝 타임 동안 두어 번 정도 등장하는 숲 장면이다. 짙은 녹색의 나무와 숲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이야기를 잠시 중단시키는 이 장면은 렌의 엄마가 일방적으로 렌과의 생활 방식을 통제하려는 시도 이후, 그리고 렌이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교실에 불을 낸 이후에 등장한다. 모두 렌이 긴장을 극심하게 느끼는 상황이다.
스크린 속에서 자연을 통한 감정의 진정을 경험하게 될 때, 관객은 렌의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동화될 수 있다. 렌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런 장면들은 관객이 렌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장치이다.
렌은 부모님의 별거를 경험하며 그동안은 눈여겨보지 못했던 외부의 사건들도 눈에 담기 시작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는 렌의 반으로 전학 온 전학생이 있다. 체구에서나 태도에서나 렌보다 훨씬 성숙해 보이는 전학생은, 이미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것이 소문이 나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렌 역시 처음에는 반 친구들과 함께 전학생을 따돌렸지만, 렌의 부모님이 헤어지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그리고 우연히 전학생과 마주쳐 함께 장을 보며 부모님이 이혼한다는 것에 대해 듣게 된다.
또한 렌은 홀로 동네를 돌아다니던 중 한 커플의 이별을 마주하기도 한다. 아이가 생겼음에도 여러 입장 차이로 헤어지게 되는 커플의 모습을 지켜보는 렌의 표정은 상당히 골똘해 보인다. 사랑과 현실 앞에서 여러 가지로 미성숙해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흥미로운 점은 전학생과의 장 보기 시퀀스와 헤어지는 연인 시퀀스가 거의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퀀스는 다시 알코올 램프 사건 시퀀스로 이어진다. 이 장면에서 렌은 이혼 가정이라는 이유로 전학생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느껴 알코올 램프로 교실에 불을 붙인다. 빠르게 변하는 주변 상황에 렌의 생각도 바뀌고 있지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렌의 갈등이 가장 잘 보이는 부분이다.
<이사>를 감상하는 관객의 관점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렌이 비와 호수 근처에서 방황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즈음에서 부모님의 별거는 거의 확실해진다. 그리고 렌은 더 이상 예전의 그리운 가정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밤새 떠돌아다니며 받아들이게 된다.
혼란의 여정을 시작하기 직전에 렌은 자신을 찾아다니던 엄마를 향해 ‘빨리 어른이 되겠다’는 말을 남기며 절을 올린다. 이 말이 슬픈 이유는 아무래도 성숙한 렌의 입장에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성장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어린이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혼란스럽고 초현실적인 풍경, 불이 붙은 배와 부모님의 환영이 사라지는 장면에서 렌은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끌어안아 준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로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씁쓸하지만 받아들인 것이다.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사건을 드디어 마주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된 렌은 자신의 혼란스러운 경험을 반 친구들에게 밝히고 ‘미래’로 나아간다.
<이사>는 준비되지 않은 가정의 해체를 겪은 어린이가 자신의 온 힘을 다해 가정을 봉합하려 하지만, 현실적인 장벽을 깨닫고 체념하여 새로운 삶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이사’라는 제목은 다소 의아함을 남길 수 있는 제목이다. 이사를 한 것은 렌이 아닌 렌의 아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의 영어 제목이 ‘Moving’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궁극적인 결말은 렌의 다음 단계로의 성장을 다루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무력감과 현실의 수긍을 그린 작품에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원문: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6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