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사람

영화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 여주인공과 엄마의 대사 중에서

by 혼밤 마음
"여주인공 : 있잖아... 계속 말 못 하고 있었는데...
엄마 : 얘가 왜 이래, 무섭게? 왜 그래?
여주인공 : 있잖아
엄마 : 응
여주인공 : 나... 회사 그만둔 지 반년 정도 됐어. 그동안 말 안 해서 미안해
엄마 : (웃음) 나는 또 뭐라고, 그랬구나? 애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여주인공 : 그럴 일은 없지.
엄마 : 그게 아니면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영영 떠난다고 하면 어쩌나 했네.(웃음) 그랬구나. 그래 고생했네... 그랬어?"
여주인공 : 응"


영화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에서

여주인공 이이즈카가 반년 동안 감춰왔던 진실을

마침내 꺼내놓았을 때,

엄마는 오히려 다른 큰일이 아니라 다행이라며 안심하듯 말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가슴이 이상하게 저릿했다.

오랜 시간, 꺼내기 무서워 쥐고만 있었던 말들이

사실은 그렇게까지 큰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겁고도 가볍게 다가왔다.




꺼내지 못했던 말 하나


나도 그런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까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이 말을 해도 될까? 상처받지는 않을까?’

생각만 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날들.


혼자서 걱정을 키우고,

상대의 반응을 마음속에서 시뮬레이션하고,

‘틀림없이 실망할 거야.’

‘분명히 나를 이상하게 볼 거야.’

혼자만의 세상에서 그 말을 수없이 삼켰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꺼낸 말에

상대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때가 있다.

“그랬구나. 왜 이제 말했어? 괜찮아.”

그 말 한마디에

나는 한동안 벽을 짓고 있던

내 마음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사실 아무 일도 아닐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건

말 그 자체보다,

말을 꺼낸 후 돌아올 상처였다.

하지만 때론 그 상처마저

우리가 만든 허상일지도 모른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너무 염치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에 눌려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를

더 깊은 방 안에 가둔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랬구나. 고생했네.”

그 짧은 말을 해주는 순간

마음이 뭉클해진다.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맙고,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기를


나는 이제 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도망치지 않으려고,

애써 괜찮은 척하던 내게

정말 필요한 건 거창한 조언이 아니라

그냥 “고생했네, 그랬어?”

그 말 한마디였다는 걸.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말을 그렇게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받았던 위로를

다시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사람.

그 말 한마디에

숨이 트이고,

걸음을 다시 내딛을 수 있는 사람.




그래, 말하길 잘했어.

오래 쥐고 있느라 무거웠지?

이제 조금은 놓아도 괜찮아.

세상은 생각보다,

우리 편일지도 몰라.



*출처 : 영화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 이이즈카와 엄마의 대사

keyword
작가의 이전글꽝 나올까 봐 복권을 안 긁는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