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그래프의 거짓말

주식, 오만함에 길을 잃다.

by 글곱

"코스피 3400 시대!"

"눈앞에 4000, 5000 시대가 펼쳐질 거야"


점심시간 구내식당.

스테인리스 식판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흘러나온 동료들의 목소리는

소현에게 밥보다 더 자극적인 감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찌개를 한 숟가락 뜨다 말고 귀를 기울였다.


"야, 이번에는 확실해. 이 주식도 올라간다니까. 차 산 애 알지? 걔도 이걸로 번 거야."


마케팅팀 차선희가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 화면에는 빨간 그래프가 급격하게 치솟고 있었다.


"진짜? 얼마나 번 건데?"

"한 달에 천만 원? 아니지, 그것보다 더 많이."

"어머머 헐, 대박. 나도 해볼까?"

"당연히 해야지! 지금 안 하면 언제 해? 모든 사람들이 다 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이미 차를 샀고, 누군가는 수익률 50%를 자랑했다. 그들의 웃음은 무심하게 그녀의 귓가를

두드렸다. 소현은 젓가락을 들고 있었지만 반찬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현씨도 주식 안 해요? 요즘 안 하는 사람이 바보라는데."


선희가 소현을 향해 물었다. 순간 식당이 조용해진 것 같았다.


"아... 저는 잘 몰라서요."

"몰라서 뭐해요? 앱 깔면 끝이에요. 얘들아, 소현 씨 주식 앱 추천해 줘."

"아니야, 여기 증권앱 써봐. 수수료 저렴해."


소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켰다.

검색창에 '주식 앱'을 쳤다. 다운로드를 누르는 손끝이 떨렸다.

다음날 아침 앱을 켜자 빨간 그래프가 꿈처럼 치솟고 있었다.

"들어와, 너도 할 수 있어."

그래프가 손짓하는 듯 보였다.

그 순간, 심장은 두근거렸다. 앞이 보이지 않던 미래 속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자신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날 이후 소현의 하루는 달라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알람을 끄기도 전에 핸드폰을 켰다.

주식 앱을 켜고, 파란불인지 빨간불인지 확인했다. 심장이 차트에 맞춰 뛰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핸드폰만 바라봤다. 사람들 사이에 서서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오늘은 오르겠지. 오늘은 달라질 거야.'

기대감은 그녀를 떠받쳤다. 문득 옆자리 아저씨도 똑같은 화면을 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승객들의 절반 이상이 빨간 차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도 일보다 차트가 먼저였다. 화면 오른쪽 아래, 몰래 켜둔 작은 창. 보고서를 작성하다 말고

슬쩍 확인했다. 빨간 선이 오르면 얼굴이 붉어졌고, 파란 불빛이 켜지면 속이 서늘해졌다.


"소현씨, 기획안 어떻게 돼가요?"


팀장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앱을 끄고 엑셀 파일을 켰다.

"아, 네! 거의 다 됐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하루는 이미 주식 차트가 지배하고 있었다.

처음엔 잘 됐다. 몇만 원, 몇십만 원이 오르자 그녀는 자신이 뭔가를 해낸 듯 뿌듯했다.


"아, 이게 진짜 되는구나."


화장실 거울 앞에서 혼자 씩 웃었다. 꿈꾸던 미래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회사에서의 무료한 일상은 견딜 수 있었다. 퇴근 후 원룸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면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언니, 요즘 기분 좋아 보여. 무슨 좋은 일 있어?"

동생 소영이 주말에 놀러 와서 물었다.


"응? 그런가? 그냥... 일이 잘 풀려서 그런가 봐."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뭔가 잘 풀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확실한 정보가 들어왔다.


"소현씨, 있잖아. 이번 종목은 진짜야. 내부 얘기도 나왔어. 놓치면 손해야."


선희가 복도에서 소정을 붙잡고 귀엣말로 속삭였다.

"정말요?"

"응, 내 남자 친구가 증권회사 다니는데, 확실한 정보야. 이번 주 안에 대박 날 거래."


동료의 단호한 말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동안 벌어둔 수익에 자신감도 붙어 있었다.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

집에 돌아와서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모아둔 3천만 원. 조금 무서웠지만, 절반 이상을 과감히 넣었다.

처음엔 빨간 그래프가 올라갔다. 소정은 웃었다.


상상은 더 커졌다. 차도 사고, 여행도 가고, 더 이상 뒤처지지 않을 미래. 엄마에게 용돈도 드리고, 동생 결혼식 축의금도 넉넉히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날. 그래프는 거짓말처럼 곤두박질쳤다.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지하철 안에서 화면을 보고 있는데 눈앞이 캄캄해졌다.

"괜찮아, 내일은 오를 거야."

스스로를 달래며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하락이었다.

빨간 그래프는 바닥을 뚫듯 곤두박질쳤다. 앱 알림은 잔인할 만큼 정직했다.

"보유 종목이 -10% 하락했습니다."

"보유 종목이 -15% 하락했습니다."

"보유 종목이 -30% 하락했습니다..." 하한가였다.


앱 알림은 잔인할 만큼 정직했다.


잔고는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2천만 원, 1천만 원...

소현은 매일 출근길에 핸드폰을 켰다. 손끝은 차가웠고, 심장은 불안에 휘둘렸다. 사무실 책상 위에선 동료들이 여전히 떠들었다.


"야, 나 이번에 또 올랐다니까? 진짜 신기해."

"어떤 종목인데? 나도 좀 알려줘."

그들의 웃음은 더 크게 들렸다. 소현은 모니터를 켜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척했지만, 작은 창 속 차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기엔 꿈이 무너지는 속도가 그대로 찍혀 있었다.

"소현아, 괜찮아? 요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팀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냥 좀 피곤해서요."

20대 후반. 모아 온 3천만 원은 8백만 원으로 줄어 있었다. 이제 곧 서른. 남들은 차를 사고, 여행을 다니고, 결혼을 준비한다.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 남자 친구랑 제주도 갈 건데, 맛있는 거 사다 줄까?"

"아니야, 괜찮아."

"언니도 여행 좀 다녀. 맨날 일만 하지 말고."


소현은 커피 한 잔 앞에서도 통장 잔고를 떠올렸다. 남은 건 불안뿐이었다.

밤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도 더 이상 차트는 그녀에게 속삭이지 않았다.

그래프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토록 반짝이던 그래프의 선은 이제 잿빛 현실을 비추는 상처에 불과했다.


어느 날 밤, 화장실 거울을 보다가 소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프에 속은 게 아니라, 자신이 숨겨온 두려움에 속은 거라는 걸.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걱정.

그것들이 그녀의 손끝을 차트에 붙잡아두었다.

창문에 비친 얼굴은 피곤에 찌든 민낯 그대로였다.


그늘진 다크서클, 초조한 눈빛. 그러나 그것이 진짜 자신이었다.


민낯의 얼굴로 마주한 순간, 소현은 알았다.

숨기려 해도, 외면하려 해도 결국 드러나는 게 있다는 것을.

그것이 불안이든, 상처든,

아니면 아직 남아 있는 희망이든.

빨간 그래프가 무너진 자리에서

소현은 비로소 진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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