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만 좇다 지쳐버린 준석
“자네, 골프는 좀 쳐봤나?”
지수의 아버지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준석은 순간 숨이 막혔다.
“아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준석 씨는 어느 대학 나왔죠?”
과일을 내어주던 지수 어머니가 자연스레 웃으며 던진 말 같았지만
그 안에 숨은 날카로움은 분명했다.
“○○대… 지방 국립대입니다.”
준석은 순간 목이 바짝 말랐다.
그 답이 나오자마자 공기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을 넘을 수 없다는 걸,
그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짧은 대답의 여운이 식탁 위에 길고 흥건하게 남아 있었다.
지수 어머니는 미묘하게 표정을 바꿨고,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안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구나.’
준석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밥을 삼켰다.
그러나 목구멍은 사막의 열기를 머금은 듯 바짝 말랐다.
값비싼 반찬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고,
식탁 위 공기만 무겁게 흘렀다.
그 순간부터 준석은 알았다.
내가 가져온 사랑과 과일바구니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세상이 만든 체크리스트는 이미 그의 앞에 놓여 있었고,
그 리스트엔 학벌, 집안, 인맥, 생활 수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는 그 리스트의 여러 칸에서 빈칸으로 남아 있었다.
준석은 지방대 출신이었다.
하지만 성실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냈고,
졸업 후 코스닥 상장 회사에 입사했다.
그것만으로도 집에서는 자랑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대학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
학비를 감당했고,
졸업 후에는 생활비까지 보태며 집안을 도왔다.
평범하지 않은 집안에서 출세한 직장인이었다.
매일 출근해서 보고서를 쓰고,
프로젝트 성과를 쌓으며
조금씩 자리를 다져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소개로 지수를 만났다.
세 살 어린, 세련된 그녀는
그의 삶에 낯선 빛을 들여왔다.
데이트할 때마다,
그녀의 말투나 습관 속에서
여유가 느껴졌으며 또 다른 세상이 스며 있었다.
명품 가방을 무심히 메고 다녔고,
주말이면 골프를 치러 갔다.
“아빠가 이번에 새 차 바꿔주셨어.”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 한마디에
준석은 가끔 마음이 쿡쿡 찔렸다.
사랑은 분명 있었다.
그녀의 웃음을 좋아했고,
함께 있을 때만큼은 세상도 버틸 만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조건에 부딪혔다.
지수의 부모님은 준석을 탐탁지 않게 봤다.
“가정 형편이… 좀 부담스럽지 않니?”
그 말은 언제나 돌려서 나왔지만,
결국 똑같은 의미였다.
준석은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지키려면,
더 나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야근을 자처했고,
실적을 위해 몸을 갈아 넣었다.
상사의 눈치를 보며 고과 점수를 챙겼다.
숫자를 쌓으면,
성과를 내면,
자신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는 또 다른 벽을 세웠다.
라인, 학연, 지연.
그가 속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장벽들.
학교 이름, 부모의 직업, 지역 인맥.
그 모든 것이 체크리스트가 되어
사람들의 평가를 결정했다.
그는 언제나 그 리스트의 끝자락에 있었다.
“준석 씨, 열심히는 하는데…”
평가 자리에서 상사는 그렇게 말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뻔했다.
“그거 뭐냐, 맞아! 임팩트가 부족해.”
그 말의 진짜 의미는
그가 가진 조건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퇴근길, 지수와 통화했다.
“오빠, 힘들지? 그래도 난 괜찮아.”
그녀는 다독였지만,
준석은 그 말이 오히려 더 쓰라렸다.
그녀가 괜찮다고 해도,
세상은 괜찮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늘 주변의 시선 속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주말에 그녀의 집에 들렀을 때,
준석은 다시금 느꼈다.
넓은 거실,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모던한 가구들 사이에서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을.
밥상 위에 놓인 음식들은 화려했지만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손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그 손을 유심히 바라봤다.
마디가 굵고 굳은살 박힌 손가락.
노동의 흔적이자,
그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할 증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준석은 지쳐갔다.
사랑을 지키려면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압박.
조건을 갖추려 애쓰면
더욱 지워져 가는 자기 자신.
어느 순간,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정장을 입고 서류를 들고 있지만
그 얼굴엔 늘 피로가 깔려 있었다.
야근으로 축 처진 어깨,
밤마다 뒤척이며 꾼 악몽의 흔적.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자문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랑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지수는 여전히 곁에 있었지만,
그녀와 그의 거리는 보이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조건과 조건 사이,
그들이 만든 체크리스트의 덫 속에서
준석은 발목이 묶여 있었다.
어느 늦은 밤,
준석은 사무실 불 꺼진 회의실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점점 꺼져가는 도시,
여전히 켜진 몇몇 빌딩의 불빛들.
그 불빛 속에는 자신처럼 야근하는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모두가 더 높은 조건을 얻기 위해
이 도시의 밤을 소모하고 있었다.
'나, 언제쯤 괜찮은 사람이 될까?'
그는 깨달았다.
사랑조차 조건으로 평가되는 세상에서
자신은 늘 후순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정말 조건이 전부일까?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을까?’
그날 밤, 준석은 오랜만에 넥타이를 풀고
거울 속 자신의 민낯을 오래 바라봤다.
지쳐 있었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는 초라한 모습.
조건의 덫 속에서도
언젠가 사랑을 꿈꾸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준석은 조용히 깊고 진한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