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무게를 진 이혼남
“이봐요, 벨 누르지 말라고 하는데 왜 누르고 그러세요?”
"배달 요구사항 안 봤어요?"
문이 코 앞까지 벌컥 열리며, 젊은 여자가 노란빛과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재훈은 당황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비도 오고 해서… 못 들으실까 봐 눌렀습니다.”
손에 쥔 음식 봉지가 빗물에 젖어 축축해지고 한 두 방울씩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냥 노크하세요. 벨 누르지 말랬잖아요.”
여자의 눈빛은 차가웠다.
문은 그 여자의 표정만큼 인정이나 싹싹한 맛이 없이 세차게 닫혔다.
남겨진 건 축축하게 젖은 재훈의 손과,
등 뒤로 흘러내리는 빗방울뿐이었다.
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배달 가방 위로 비가 쏟아지고,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 무거웠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아이와 약속한 운동화를 마련해야 했으니까.
재훈은 40대 중반.
사업을 여러 번 벌였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치킨집, 중고차 매매, 인터넷 쇼핑몰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남은 건 1억이라는 빚뿐이었다.
은행 계좌는 막혔고, 대부까지 손을 뻗다가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아내는 떠났다.
빚 독촉이 시작되자 잠적했다.
연락처도,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가진 건 열 살 난 딸아이 하나뿐이었다.
술에 기대 살아가던 시절,
그 작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아이에게만큼은 등을 돌릴 수 없었다.
“아빠, 어디 가?”
"응 아빠 볼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올게"
서민금융지원센터를 찾았다.
개인회생을 신청하고, 서류를 내밀었다.
창구 직원은 무표정했다.
"216번 고객님"
“서류 보완하시고, 변제 계획 내셔야 합니다.”
재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했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내가 이렇게 죄인처럼 살게 될 줄이야....'
한 장 한 장 도장을 찍을 때마다,
자존심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집은 은평구 반지하였다.
좁은 창문은 빗방울 소리를 그대로 들여왔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얼굴에 힘을 주고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딸은 여전히 해맑았다.
그러나 혼자서 키우는 일은 고됐다.
머리끈 하나 묶는 것도 서툴렀다.
딸의 머리는 언제나 삐죽거린 아이처럼 엉망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웃을 때면
아이의 어깨가 움츠러들곤 했다.
재훈은 밤마다 미안한 마음에 술을 찾았다.
낮에는 물류센터에서 짐을 날랐다.
허리와 어깨는 늘 뻐근했고,
손바닥엔 굳은살이 깊게 박였고
밤이 되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섰다.
비 오는 날이면 시야가 흐려졌다.
가방 속 음식은 따뜻했지만,
그의 몸은 점점 식어갔다.
그럼에도 그는 달렸다.
월세를 내고,
조금이라도 빚을 갚고,
아이를 키워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은 늘 모자랐고,
몸은 부서져 갔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의 웃음 하나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가끔 재훈은 생각했다.
‘이 지옥 같은 삶이 언제쯤 끝날까.
나는 언제쯤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동시에 다른 바람도 생겼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사람이 필요했다.
빚과 실패, 초라한 민낯을
짐이 아닌 사람으로 안아줄 단 한 사람.
'혼자가 너무 고되고 외롭다.'
'어쩌면 너무 큰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내가 힘든 거 알아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
밤거리를 달리며 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볼 때마다
땀과 빗물에 젖은 초라함만 느껴졌다.
작은 반지하 방,
아이의 웃음소리와 뒤엉킨 고단한 한숨 속에서,
그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짊어진 건 무너진 삶의 무게였지만,
재훈의 민낯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처럼 밤을 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