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의 첫 모임

조건을 묻지 않는 얼굴들

by 글곱




재상은 글 소재를 찾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무엇인가 민낯을 드러내고 싶어하진 않을까?'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맑은날 빨래 널듯

털어버리는 모임 하나 만들면 좋을것 같아.'


재상은 지역 커뮤니티 모임 계정을 만들었고, 거기에 짧은 글을 올렸다.


“민낯의 자리. 조건은 없습니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분,

누군가에게 후련하게 털어놓고 싶은 분, 그냥 편하게 오시면 됩니다.”


그는 사실 소설을 위한 자료를 얻으려는 목적이었지만,

말을 적는 순간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혹시 올까? 과연 누가…?’

'오겠어? 에이.. 오겠나"'


첫 모임은 동네 카페로 장소를 정했다.

마땅한 곳이 없었다.

아니, 사람들이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조용하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자리에 앉자 커피 머신 소리가 거슬렸다.

옆 테이블 연인들의 웃음소리도 신경 쓰였다.


자신의 민낯을 꺼내기엔

너무 많은 눈이 있었다.


그런데 옆 테이블을 붙일 정도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하나, 둘, 셋.... 다섯....


모임이 생각보다 커지자 다른사람들을 향해 말을 건냈다.


“여기 말고… 다른 데로 옮길까요?”

재상이 제안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성훈이 말했다.

“우리 사무실로 오시죠. 지금은 문 닫았으니까.”


그리하여 첫 모임은

에어컨 수리업을 하는 성훈의 작은 사무실로 옮겨졌다.


낡은 간판 불빛이 꺼져 있고,

문을 열자 기계 부품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길고 넓은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

낯설지만, 그래서 더 넓고 편한 공간이었다.


먼저 도착한 건 소현이었다.

20대 후반, 검은 모자를 눌러쓴 그녀는

남은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두 손으로 꼭 쥔 채 앉았다.

눈빛이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고 조심스러웠다.


그 다음은 혜정이었다.

아버지를 휠체어에 모시고 겨우 시간을 내 온 듯,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표정은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그녀는 의자에 앉자마자 짧게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 진짜 괜찮은 거죠?”


불안한 듯 물었지만,

동시에 안도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문이 열리며 재훈이 들어왔다.


배달 가방을 벗어놓자, 방 안에 음식 냄새가 스며들었다.

땀에 젖은 셔츠가 축 늘어져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딸을 두고 잠시라도 집을 비운 아버지의 마음,

그 무게가 어깨 위에 고스란히 보였다.


곧이어 미애가 들어왔다.

환자복은 아니었지만, 수술 자국을 가리듯 헐렁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으며


“이런 자리가 있는 줄 몰랐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은 어쩐지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 같았다.


그리고 용식.

평소엔 편의점 카운터 뒤에만 서 있던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나타났다.

그의 빈자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오늘은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재민이 왔다.

게임기 대신 작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고,

들어오며 곧장 벽 쪽에 앉았다.


“그냥… 잠깐만 앉아 있다 갈게요.”


그의 말투에는 방어심리가 묻어났다.

그러나 그가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으로도

이미 큰 변화였다.


준석은 조금 늦는다고 재상을 통해 메세지가 왔다.


방 안에는 묘한 공기가 흘렀다.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불편하기보다 낯선 설렘에 가까웠다.


조건도, 겉치장도, 설명도 필요 없는 자리.

각자의 민낯이 스스로를 드러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성훈이 낡은 탁자 위에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는 그냥… 벽 얇은 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됩니다.”


그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두가

서로를 흘깃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누군가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건은 없어요"

"단지 이 곳에서 있었던 대화나 내용은

우리만 알고 있기로 해요."


"그럼 제 이야기 부터 시작할까요?"

재상이 먼저 적막한 분위기를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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