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다
재상의 말이 끝나고
분위기는 조금은 달라졌지만
방 안은 여전히 어색한 공기로 가득했다.
종이컵에 담긴 미지근한 커피,
사무실 한쪽에 놓인 낡은 부품 상자들이 배경이 되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지만,
모두가 뭔가를 품고 있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 말을 꺼낸 건 소현이었다.
그녀는 모자를 벗어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주식이요. 처음엔 잘 되는 것 같았는데,
결국 다 잃었어요. 스물아홉인데… 남은 게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조금씩 풀렸다.
“처음에는 진짜, 내가 뭔가 해낼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침마다 핸드폰만 보고,
회사에서도 몰래 차트만 보고,
결국은 제 인생이 다 하락장이 돼버렸어요.”
재훈도 주식을 했는지 맞장구를 쳐됐다.
눈물이 맺혔지만, 끝까지 울지는 않았다.
옆에 있던 혜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스무 다섯 살 이후로 아버지랑 단둘이 살았어요.
사고로 장애 판정을 받으시고,
엄마는 떠났거든요.
그래서 연애는… 그냥 TV 속 얘기 같아요.
이제 마흔인데, 아직도…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녀의 손이 무릎 위에서 바르르 떨렸다.
누군가가 티슈를 건넸다.
재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신불자입니다.
사업 다 망하고, 빚만 남았어요.
아내는 도망갔고, 딸아이 하나랑 반지하에서 살아요.
머리 묶어주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아빠인데…
그래도, 애 때문에 버텼어요.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처음입니다.”
말이 끝나자 방 안은 깊은 정적에 잠겼다.
그러나 그 정적은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각자의 민낯이 한 겹씩 벗겨지고,
그 자리에 서로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듯했다.
성훈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낮게 웃었다.
“음...난 어플로 여자 만났다가… 다 망했어.
사랑인 줄 알았는데, 그냥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었더라고.
지금도 내가 설치한 에어컨 밑에서 딴놈하고 신나게 놀겠지
근데 이상하게도,
여기선 그런 얘기를 해도 부끄럽지 않네.”
누군가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다’는 듯,
‘네가 이상한 게 아니다’라는 듯.
그날 밤,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았다.
민낯의 자리,
그 이름이 조금씩 의미를 갖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우리 이러지말고
단톡방도 만들죠? 서로 응원하고!"
그날 이후 모임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모였다.
성훈의 사무실은 어느새 작은 안식처가 됐다.
낡은 의자와 탁자 위에 놓인 종이컵,
형광등 불빛마저도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누구나 이야기할 차례가 있었고,
그 차례마다 작은 불빛이 켜졌다.
미애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인 날이 있었다.
“흉터요. 거울 보면, 아직도 참…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근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그냥, 살아있다는 증거 같아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사람들이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된 침묵을 깨는 불빛 같았다.
용식은 술김에 속마음을 털어놨다.
“난… 사실 여자를 한 번도 제대로 사귀어본 적이 없어.
다들 외모 보고 웃고…
모자 속 빈자리 알게 되면,
그냥 연락 끊더라.
근데 여기선 그 얘기해도… 편하다.”
그가 고개를 떨구었지만,
주변의 시선은 비난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재민은 조심스럽게 이어폰을 빼며 말했다.
“게임 안에서만 살았어요.
근데 여기 와서, 그냥 얘기하는 게… 게임보다 재밌네요.”
그 말에 방 안이 웃음으로 물들었다.
그 웃음은 크지 않았지만,
분명 서로의 상처 속에서 희망을 찾는 신호였다.
그들은 각자의 불빛을 꺼내놓고 있었다.
흔히라면 감추고 싶은 흉터, 빚, 실패, 외로움.
그러나 누군가와 나눌 때마다
그 무게는 조금씩 가벼워졌다.
재상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게 내가 찾던 장면일지도 몰라.’
소설을 쓰겠다고 시작한 모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그 역시 이곳에서 위로를 받고 있었다.
민낯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걸,
다른 이들의 존재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방 안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낡은 형광등 하나뿐이었지만,
작은 불빛 속에서
우리들은 서로의 무거운 그림자를 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