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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이란 이름으로 범벅된 그 이상의 무엇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고

by 임가영

'엘레나 페란테'의 4부작 중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는 이탈리아 나폴리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두 소녀 릴라와 엘레나의 이야기다. 두 인물의 유소년 시절부터 격동의 사춘기,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는 우정의 이름으로 범벅된 인간의 잔혹함과 질투, 시기, 욕망.... 그 이상의 무엇이 담겨 있다.

대학 시절 이탈리아 르네상스 연극을 배울 때도 그랬지만 이탈리아 희곡은 극의 내용이나 줄거리, 구성을 떠나 이탈리아어로 된 인물 이름 자체가 생소해 대본 자체가 어렵게 느껴졌다. 1페이지부터 499페이지에 이르는 책장을 덮기까지 주인공인 릴라가 있는 체룰로 집안, 엘레나가 사는 그레코 집안, 그 외에도 책 속에 등장하는 카라치, 펠루소, 카푸초 집안 등 시골 마을의 가족과 구성원들을 완벽히 파악하기에 시간이 좀 걸렸다.

외국인에게 박경리의 <토지> 속 수많은 주인공들의 이름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타국에 대한 특별한 배경 지식 없이 이야기에 푹 빠져들기에는 등장인물과 지명 자체가 너무나 낯설었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미국 HBO에서 2018년부터 최근까지 시즌 4에 결처 드라마로 방영되었다. 시간이 되면 미드를 보면서 이 드라마틱한 소설을 영상으로 어떻게 풀어냈을지 매력에 푹 빠져봐야겠다. 명절이나 돼야 짬을 내 영화나 드라마 몰아보기를 할 수 있는 신세지만 마음속 버킷리스트가 하나 더 생겼다.


무얼 해도 큰 노력 없이 척척 해내는, 거기다 예쁘기까지 한 친구가 있는가 하면 죽어라 노력해도 친구의 그늘에서 늘 언저리만 맴도는 친구가 있다. 하물며 그 예쁜 친구는 돈 많고 부유한 사람을 신랑으로 맞이하고, 늘 그녀의 2인자라 여겼던 친구는 얼굴도 별로고 연애 또한 잘 풀리지 않는다.

세상은 불공평한 듯 평등하다 했는가?

전자인 릴라는 태어날 적부터 명석한 두뇌와 어떤 상황에서도 서슴지 않는 당당함이 있었지만,

구두수선공의 가난한 딸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부잣집 남자와 결혼을 한다. 후자인 엘레나는 시청 수위의 딸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진학해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 엘라나는 릴라가 다니지 못하는 고등학교에서 만점을 받을 정도로 학교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늘 릴라 앞에 서면 뭔지 모를 자격지심에 시달린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가계도가 익숙해질 무렵 주인공인 릴라와 엘레나의 심리 상태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마을 청년들과 옆집 밥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조그만 마을의 분위기. 더욱이 격정의 사춘기를 맞이하는 그녀들의 마음속 우정이란 테두리 속에 숨어있는 시기와 질투, 증오와 분노, 수치와 오만 등의 감정이 곳곳에 묻어나 있다.


여자들의 우정은 특별하고 복잡하다. 겉으로는 평생을 함께할 것 같은 우정을 맹세하고도 애인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거기다 자녀들까지 태어나면 한 시절 빛났던 우정은 금세 가정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걸 흔히 볼 수 있다. 우정이라는 말로 가장 가까이에서 상처주기를 서슴지 않고 때론 도를 넘어 간섭하기도 한다. 실 예로 난 고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친구 a에게 지금의 남편인 b와 결혼할 작정이라며 앞으로의 장밋빛 계획과 로맨스를 취중진담 삼아 털어놨다. 고1 때부터 무려 17년을 사귀고 결혼을 앞둔 적령기였기에, b와의 결혼은 그저 내게 운명 같은 일이었다. 평소에는 나의 모든 걸 다 이해해 줄 것 같은 친절함과 상냥함으로 나를 대하던 a는 결혼 얘기가 나오자 돌변을 했다. 미용사인 남편과 결혼을 해서 뭐 어쩔 건데란 식으로, b의 집안까지 들먹이며 내게 모욕감을 줬다. 그 뒤로도 몇 년을 그 친구와 만났지만 한 순간 가시처럼 박혔던 절친의 말 한마디는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다 결국 a와 손절을 했다.


여자들의 우정 속에는 말론 표현할 수 없는 형형색색의 감정이 실태래처럼 꼬이고 꼬여 있다. 뭐 여기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마흔 중반을 살아온 나의 경우엔 그렇다. 사랑만큼 완벽한 우정은 없다. 설레고 가슴 뛰던 첫사랑도 시간이 지나자 인생을 함께 하는 친구와의 우정처럼 옅어져 가니까... 하지만 30년이 지난 여자들의 우정이라면, 이 것만큼 매력적이고 삶의 위로가 되는 소중한 것이 있을까? 농익은 삶을 살아낸 여자들의 우정이라면 이보다 더 멋진 것이 있을까?




12살인 딸과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친했던 친구가 자신만 쏙 빼고 동호회에 들어가 점심시간이 쓸쓸해 속이 상하다고 한다.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세상의 전부와도 같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별것도 아닌 일에 토라지고 무리를 만들어 함께 쏘다니던 나의 옛 학창 시절.

우리 딸! 엄만 네가 1명의 친구와의 우정, 관계에 연연하기보단,
그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슬퍼하기보단,
너 자신을 더 아끼고 사랑하면 더 좋겠어. 인생은 어차피 혼자야.

"엄마 인생은 독고다이?"

"꼭 그렇다기보다는 친구와 좀 멀어졌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봐. 다른 친구와 세상의 멋진 것들을 향해 눈을 돌리고 살다 보면 그 친구와 다시 친해질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고..."


사춘기를 맞이하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눈부신 친구> 릴라와 엘레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일한 그리움의 대상은 릴라였다. 내 편지에 답장 한 통 없는 릴라. 내가 없는 동안 릴라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나는 두려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것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어온, 살면서 단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릴라의 삶의 일부분을 놓침으로써 내 삶의 밀도와 중요성까지도 희석될 것 같아 두려웠다.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p.277 / 한길사


때론 부딪히고 때론 함께 울고 웃는 진한 우정을 통해 성장하고 세상 앞으로 나아가는 당당한 딸이 되기를 바라며 엘레나와 릴라를 떠올린다. 그리고 흔하지만 뼈 아픈 말 '여자의 적은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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