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의 <구의 증명>을 읽고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죽은 구는 꼭 술에 취해 곤히 잠든 사람 같았다. 나는 길바닥에 앉아 죽은 구를 안고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바람에서 새 옷 냄새가 났다. 비가 올 것 같아. 비가 오면 어쩌지 비가 오면 좋겠다. 아니야 비가 오면 안 되지.
깊은 밤 잠 못 드는 몸처럼 이리저리 뒤척이던 걱정과 바람. 쇄골까지 내려온 구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니 푸석한 무리칼이 한 움큼 빠졌다. 손에 쥔 그것을 가만히 보았다. 버릴 수 없어서, 돌돌 말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밤은 천천히 가고 비는 오지 않았다. 나는 울지 않았고 구는 숨 쉬지 않았다. 죽은 구를 안고 있었지만 그와 죽음이란 개념은 전혀 연결되지 않았고 같은 극을 띤 자석처럼 강렬하게 어긋났다.
최진영 <구의 증명> p15~17
죽어가며 간신히 움직인 그 의지를, 뼈와 근육을 구의 마음을, 어떤 상상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나의 뇌를 꺼내 내팽개치고 싶었다.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무엇이 구를 죽였는 가. 나는 사람이길 원하는가.
최진영 <구의 증명> p472
'안녕'하고 말했는데 '안녕'으로만 끝날까봐. 아니, 그 인사조차 돌려받지 못할까봐.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겉치레 인사 말고, 너의 고유한 표정과 감정을 갖고 싶었다. 네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분명 네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화를 내면서 하지 말라고, 아프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면 나는 깐죽거리고 싶었다. 왜? 왜 하면 안 되는데? 시비 걸 듯 놀리면서 우리만의 특별한 시간을 고무줄처럼 쭉쭉 늘이고 싶었다.
최진영 <구의 증명> p483~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