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잠시 멈춰 샛길로 빠져 상상하는 일을 좋아한다. 종종 상상이 현실로 되는 순간도 있었지만, 예를 들면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졌던 내가 기자가 된 후 뉴스룸 앵커를 하는 상상, 백화점 쇼윈도 안에 빨간 원피스를 입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상상 등은 현실이 되어 성취감과 기쁨을 맛보게 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처음 기자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어온 상상 중 이것만은 현실이 아닌 나래가 되어 가끔 날 꿈꾸게 하곤 했다. 취재를 하다 보면 각양각색의 직업군과 남녀노소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할 일이 생긴다.
회사에 입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끔 해온 발칙한 상상 중 하나는 '만약에 취재를 하러 갔는데 정말 끌리는 남자가 있어. 그럼 어쩌지? 전 사랑하는 b가 있어요' 이렇게 말해야 할까? 아님 그냥 마음속으로만 '아 정말 매력적인 남자야.' 하며 집에 와서 와인을 음미해야 하나? 솔직히 기자를 시작한 스물여섯부터 마흔넷이 된 지금까지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근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충북을 권역으로 한 취재 현장에선 나의 발칙하고 다소 위험한 상상이 현실로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취재를 하러 가서 염불보다 잿밥에 맘이 있는 건 결코 아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자신의 분야에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면 인간적으로 끌리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취재원들은 아주 나이가 많거나 그냥 그들의 일 자체가 멋져 보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평소 내 이상형이었던 이병률 시인이 청주시립도서관에 북 콘서트를 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5년 전 그 보도자료를 보고 얼마나 마음속으로 오두방정을 떨고 두근거렸는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북 콘서트 날짜와 행사 개요, 장소 정도가 적힌 보도자료를 읽고 또 읽었으니 말이다. 근데 정작 난 몹시도 떨려서 이병률 작가를 섭외하지 못했다. 인터뷰 섭외가 안 됐을지도 모르지만, 인터뷰를 하다 바보같이 허둥지둥 말문을 잇지 못하면 어쩌나 한가득 걱정인형이 되어 결국 취재는 포기했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평소 책을 좋아하는 엄마와 동행해 잔뜩 멋을 부리고 북 콘서트 방청객으로 그를 보러 갔다.
작가의 손짓과 시선, 목소리까지 온갖 신경을 집중해 강연을 듣고 있는데 작가가 질문을 한다. "아직 용기가 나질 않아 상대방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일까요?"
옆에 앉은 엄마가 손을 번쩍 든다.
"전 사실 결혼하기 전 첫째 아이를 임신했어요. 지금 제 옆에 앉아 있는 딸을.. 아이를 지울까도 고민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러지 않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그 순간 작은 생명체가 얼마나 불안했을까 생각하면 딸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의 답변이 끝난 후 이병률 작가가 우리 모녀를 번갈아 쳐다봤다.
"청주에 이런 미녀 모녀가 있는 줄 몰랐네요. 용기 내서 이야기해 주신 어머니께 박수를..."
강연이 끝난 후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의 책을 수줍게 들고 그에게 사인을 받았다.
2018년 이병률 작가에게 사인을 받다
임가영 님
인생의 숨결마다
좋은 에너지만
2018 청주의 여름 이병률
그 뒤로도 난 그의 신간이 나올 때면 작열했던 그날의 여름 공기를 떠올리며 천천히 숨을 내쉰다.
그리고 5년 만에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던 강렬한 무언가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충북음악협회장이 sns에 올린 북문누리아트홀 개관 기념 공연 '송영훈 첼로 리사이틀'을 본 순간이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마구마구 뛰었다.
세계 정상급 첼리스트를 말도 안 되는 저렴한 관람료로 그것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니... 청주시민인 게 이렇게 기쁠 수가! 북문누리아트홀은 청주시가 침체되어 가는 원도심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기획한 문화 예술공간 지원 사업으로 탄생한 음악당이다. 오래도록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5% 라면 나머지 95%는 송영훈 첼리스트를 향한 동경이었다.
공연 당일 b가 휴무다. '나 첼로 공연 보고 올 테니 집에서 애들 좀 봐줄래?' 할까도 고민했지만 티켓을 한 장 더 구해 b와 함께 공연을 보러 나선다.
청주시 상당구 상당로 청주중학교 근처에 자리한 북문누리아트홀.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아담한 공연장에서 연주자를 5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보다니... 오 맙소사!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행여나 b에게 아 마음을 들킬까 내심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송영훈 첼리스트가 무대에 선다. 수려한 외모에 훤칠한 키, 첼로는 왜 이렇게 또 예쁜 거야.
첫 곡으로 슈만의 <환상소곡>이 연주된다. 슈만이 그의 아내 클라라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헤어져 있을 시기에 작곡된 곡이다. 노을처럼 애잔한 그리움과 애달픈 사랑이 그의 첼로 연주로 표현된다.
단 1초도 그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첼로 지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화려한 테크닉과 달리 그의 하얀 손가락은 너무나 유연하고 순수했다.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연주할 때쯤에는 내 안의 모든 세포가 슬픔으로 물들어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아득했던 그 순간 정신을 차렸다. 아차 내 옆에는 b가 있지. 한 곡이 완주될 때까지 완전히 몰입해 연주를 듣다가 곡과 곡 사이 인터미션 시간에는 여운을 감출 수가 없어 동공이 풀어진 것만 같았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 피아졸라의 위대한 탱고가 연주될 때까지 1시간 남짓 동안 난 깊은 사랑에 빠졌던 것만 같다.
선율의 강렬한 고저에 따라 연주자가 내뿜는 숨소리와 미세한 표정까지도 한 순간도 놓치기 싫었다.
깊은 여운을 마음 가득 안고 b와 함께 차에 탔는데
기분이 묘하다.
꼭 사랑에 빠졌다 들킨 유부녀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슬슬 b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그런데 b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