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작가의 글은 마음씨 좋은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아 내 몸에 대한 설명을 차분하게 듣는 시간 같다.
가로수도서관에서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과 헤르만 헤세의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그리고 박종인의 <기자의 글쓰기>를 빌려왔다. 여기서 정여울과 헤세는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지만, 기자가 싫다며 회사를 뛰쳐나온 내가 5년 전쯤 읽었던 <기자의 글쓰기>를 다시 골라온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기자란 직업을 궁금해하는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수능 예비소집 관련 취재로 갔던 C 고등학교에 7월 7일 진로 특강을 하게 됐다. 강의 날짜도 러키세븐이 두 개나 겹치고, 17년간의 기자 생활을 진지하게 돌이켜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 같아 별다른 고민 없이 덥석 하기로 결정을 했다.
학생들과 보낼 한 시간 남짓을 막연히 떠올리기만 했지 목차나 내용 등 제대로 된 고민을 아직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강연 시간이 1시간 40분으로 늘어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부터 소위 말해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시계를 거꾸로 돌려본다. 앞으로 닥쳐올 일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설렘 가득 안고 첫 출근을 했던 날, 충북에서 손꼽히는 주당을 사수로 둔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주를 들이부어 신호가 걸릴 때마다 오바이트를 했던 날, 변사체를 처음 보고 졸지 않은 척 연기했던 날, 온몸에 불 냄새가 배었던 화재 현장의 강렬함과 잔인함, 단독 보도를 처음 했던 날 등등 나의 지난날들이 빠르게 스쳐간다.
오늘은 대략 제목과 프롤로그, 목차, 에필로그 정도만 정해 놓고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봐야겠다. 강의 100분 내내 진땀이 버적버적 솟아오를지, 아니면 학생들과 소통하며 즐겁고 짜릿한 시간을 보냈을지는 특강 이후에 다시 글로 옮겨 봐야겠다.
본격적인 사직 전 한 달이 어리바리 '인턴 백수'였다면 본격적인 백수 생활이 일주일 가량 지나자 대략 하루의 일정한 루틴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아침밥을 준비하고 드라마 속 착한 엄마처럼 볼 뽀뽀로 하루를 연다. 현재까진 대부분 점심 약속이 있고(밥 사주는 사람이 제일 좋더라. 백수가 되어보니 앞으로 함께 갈 사람과 그냥 스쳐갈 사람이 명확히 구분된다. 왜냐, 밥을 함께 먹는 시간은 소중하니까) 오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운동과 첼로는 오후로 밀고, 컨디션에 따라 이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하루를 쪼개어 전시장과 문화 현장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난다. 길고 먼 여행을 떠나고 싶은데 이건 아직 장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