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책봄>'이처럼 사소한 것들'
책 너머의 상상
자신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강박... 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기자에서 소위 말하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내게 펼쳐진 세상은 다른 시공간에서 사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45년간 내 나름의 기준이라고(아니지... 기자가 된 이후의 기준이니까 20년이지) 여겨왔던 가치관이 그야말로 '역지사지'가 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기자의 입장에선 백번을 고민해도 옳은 선택이었다고 확신했던 일들이, '어공'이 되고 나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의 감정선을 존중하며 지내왔던 지난날의 나를 한편에 밀어 두고
내가 아닌 제2의 제3의 제4의 인간이 되어 1,2,3,4를 상상해 본다. 꼬리에 꼬리를 물다 다다른 생각은 결국
'하찮은 인간인 나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였다.
그러다 보니 내 머릿속은 요즘 이런저런 상념들로 항상 멀티태스킹에 분주한 모양새다.
그래서 더욱더 내겐 '느리게 생각하는 시간'인 책 읽는 순간이 더욱 필요했다.
처음 계획은 주 1회 충북도교육청의 <언제나 책봄> 운동을 실천하고 싶었지만 이 일에 밀리고, 저 일에 치이다 보니 화장대 위에 잔뜩 쌓인 책들은 안데르센의 '장난감 병정'들과 닮은 꼴이 되어있었다.
내 마음속 요정들이 동했던 걸까? 엊저녁 쏟아지는 졸음을 뒤로하고
클레어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짚었다. 그 이유는 책의 두께가 가장 얇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을 것이란 얄팍한 생각을 맘에 두고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갔다.
이 소설은 18세기부타 20세기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는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 불법적인 잔혹행위들이 담겨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작가는 큰 스토리 줄기와 맥만 던졌을 뿐, 친절한 설명이나 묘사는 그려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독자로 하여금 두고두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 건 아닐까?
막달레나 세탁소의 기록은 대부분 파기되었거나 분실되었거나 접근 불가능이었다고 한다.
2021년 초 모자 보호소 위원회에 따르면 9천 명의 아이들이 사망했다. 이 시설은 가톨릭 교회가 아일랜드 국가와 함께 운영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곳이었지만 정부는 막달레나 세탁소에 대해 아무런 사죄의 뜻도 표명하지 않다가, 2013년이 되어서야 엔다 케니 총리가 사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
내 앞에 닥친 현실이 진실이라는 확신에 차 있다가도 뒤돌아서면
또 다른 사실이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또 다른 현실 속을 넘나드는 요즘.
'그들만의 리그'라 칭해지기도 하는 각자의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고 달라서,
가끔은 어느 하나의 기준점을 둔 채 이리 재어보고 저리 재어보는 나 자신이 되레
이상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요즘.
단편 한 권을 읽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나를 돌아보고,
이 세상을 반추해 본다.
그래서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소설'인가 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때로는 이런 사소한 것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걸 사람들은 모르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며
조금씩 성장(?), 혹은 나이 들어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