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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Nov 10. 2023

耳順, 그리고 심리상담

11월 9일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선생님 그동안 일이 많았습니다. 지난 금요일 선생님을 만나고 난 후, 남편과 다시 이혼하자는 말이 나왔고, 이젠 진짜란 생각에 일단 1년 살 집을 계약하고, 이사 날을 12일로 결정했습니다.  상황이야 늘 그런 식이지요. 저마다의 입장이 제일 중요한, 더 이상 상처받기 싫은...


하똘이와 같이 가야 하니, 가능하면 배 이용 시간이 짧아야 해서 펫 룸도 있는 완도항 여객터미널의 카페리를 예약했습니다. 정말 일사천리지요? 저녁쯤 집에 오니 된장국 냄새가 솔솔, 가족들이 저녁을 먹고 있습니다. 같이 먹자고 하지만, 저는 ‘일요일에 이사하니, 그때까지만 참아줘.’라고 말하고 제 방으로 올라갔습니다. (2층이 있다는 게 이리 좋습니다.) 당장 빠른 시일에 나가달라며, 그동안 자기는 나가 있겠다고 이불을 둘둘 말아 나가더니... 이 평화로운 분위기는 또 뭐지? 그래도 팽팽하게 당겨진 숨 막히는 분위기보다는 낫다 싶더라구요.


수요일 아침, 아이들이 나가고 남편에게 이혼서류를 접수하려면, 개인 서류가 있어야 한다. 서류 가져오면 내가 접수하고 가겠다고 했더니, 언제는 자기 말을 그리 잘 들었냐고 합니다. 그러는 당신은? 또 기승전 제 탓이 되는 건가요? 어느 새 전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듯합니다. 모든 것을 제 탓으로 돌리는 듯 느껴지니까요.


이혼하고 갈래, 별거를 할래? 당신이 이혼하고 아주 나가라며? 팽팽. 남편은 결국 한 발을 뺍니다.  별거를 하더라도 뭔가 규칙은 있어야지. 우리도 처음이라 잘 몰라서 어떡하면 되는지? 상담선생님한테 물어볼게. 일단 6개월 후, 그리고 1년 후 대화하는 것으로 하고. 상담치료는 각자가 알아서 받는 것으로 땅 땅 땅.


이혼을 전제하고 먼 곳에 가서 방을 구하며, 왜 그리 서러운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다니는지, 누군가와 전화만 해도 눈물이 나와 끊어 버린 곤 했습니다. 그리곤 늘 하던 대로 돌아갈 다리를 끊는다는 다짐으로 계약금도 규정보다 많이 입금했지요.  


공항에서 차를 몰고 저녁놀을 보며, 집으로 오는 길도 사무치게 외로웠습니다. 내가 왜 내 집을 두고, 월세살이를 해야 하지? 하지만 제 안에선  이렇게도 이야기하더군요. 삶은 외로운 거라며? 늘 그렇게 되뇌더니, 뭐 하는 거야?? 구질구질하게...


하지만 별거라고 뭐 별것도 아닌 듯, 창문, 벽지, 가구, 문손잡이, 욕실 타일, 주방 용품 등 꼼꼼히 제 손이 안 탄 것이 없는 집을 떠난다는 것은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별거 후에도 우리 부부의 삶에 대한 입장은 달라질 게 별반 없을 듯하고. 그러면 6개월 후, 1년 후에 또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꿈을 꾸었습니다.


몇몇 사람들과 사무실 같은 곳에 있었어요. 3-4인용 소파에 남편과 다른 사람들이 앉아 있고, 나는 그 옆에 있었지요. (옆 의자에 앉았는지, 서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무얼 가지러 다른 곳에 갔다 오니, 남편이 웃옷을 벗고 소파에 길게 누워 있고, 어떤 여자가 상의는 벗고, 검정 팬티만 입은 채로 소파에 앉듯이 남편의 헐벗은 배 위에 앉아 있습니다. 남편의 속살이 저리 허연가 싶었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뭐 하는 짓이야? (여자에게는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일어나! 남편은 예의 뭐가 문제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말과 표정을 짓습니다. 아니 뭐가 문제야.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사람 참 답답하네. (이건 내가 남편의 말을 내가 들은 방식으로 엮은 것입니다.)  


작년 봄인가, 저희 집 길 건너 딸과 둘이 살던 여성이 이사 간 후, 우리 동네에 볼 일이 있어 오게 되었고, 마침 남편과 마당에 있던 차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보다 남편을 먼저 알긴 했어도, 저와도 잘 알고 술친구이기도 했으니 숙박의 문제라면 저에게 전화를 하면 되었지요. 스피커폰으로 **씨(남편의 이름) 나 하루 재워주라. 남편은 저를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응. 그려. 그렇게 둘이 결정을 하더군요. 전화를 끊고, 왜 나랑 상의 안 하고 결정해? 했잖아. 스피커폰으로 하는 소리 들었잖아. 그게 나랑 상의한 거야? 그때의 표정과 말투 그대로, 남편은 꿈에서 허연 맨 살이 드러난 배 위에, 검정 삼각팬티 외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여성을 앉힌 것이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주 기가 막히고 답답하다는 듯 저를 쳐다봅니다.

 

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다 보니(대부분의 경우 저는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자리를 피하는 편입니다.) 목이 올라온 운동화를 꺾어 신게 되었고, 걸음도 불안했지요. 이때부터 제가 이전의 저와 다르게 행동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앉아 목이 꺾인 운동화를 제대로 신고 자크까지 채우고, 도망치듯 하지도 않고 안정된 걸음으로 그곳을 나왔답니다.


꿈을 꾸고 일어나니. 제 스스로 징징 울던 어제와 다르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때 예의 멋진 책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박완서, 1989)  

제 삶의 길목을 지키는 문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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