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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생리대를 갈아야 하는데 하면서, 몸은 계속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이미 생리혈은 바짓가랑이를 지나, 내가 앉은 의자에 검붉게 스며있다. 누군가(남자)가 나를 기다리며 어딘가를 가자고 한다. 나는 같이 가기도 해야겠고, 생리혈이 묻은 채로 갈 수도 없고 걱정이 태산이다. 내가 일어나면 나와 동행하려던 사람도 그리고 주변의 여러 사람도 다 볼 텐데... 그리고 나를 탓한다. ‘왜 나는 매번 이러지? 어떻게 생리혈 단속을 이리 못하지? 뭐가 그리 바쁘다고, 생리현상을 뒤로 미루냐고!’ 걱정과 불안함에 잠에서 깬다. 안도의 시간도 잠깐, 부끄러움이 앞선다.(2월 27일)
이젠 생리도 안 하는데, 이젠 그리 바쁘지도 않은데... 나는 아직도 생리혈을 흘려 당황하고 부끄러운 꿈을 가끔 꾼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이 부끄러움이다. 삶을 돌이켜 보면, 왜 그리 살았는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누군가는 치열하게 누군가는 평안하게 사는 삶을 나는 치열하지도 평안하게 펼쳐가지도 못했다. 그저 생각이 미치는 대로 살다 보니, 음악으로 비유하면 엇박과 불협화음, 그림으로 치면 좋은 도구로 흙에 마구 낙서를 한 듯하다.
오래전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있다. J, K 그리고 친구 S.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J는 여전히 지역사회에서 대학 강의, 슈퍼바이저 등을 하며 한몫을 하고 있다. 더해서 자기 관리와 가정도 멋지게 꾸리는 듯하다. K는 얼마 전 이혼 했다며,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인다. 그리곤 내게 주려고 싸 온 보따리를 푼다. 그녀가 사용하던 옷 등이 들어 있다. K는 늘 나에게 주는 사람이다. 나는? 나는 그저 오래전에 이들과 함께 하던 사람이다.
이들과 식사를 하는데, 내가 음식을 입 안에 가득 그야말로 쳐 넣고 있다. 잘 씹지도 못하고 흘릴 정도로... 그런 나를 또 다른 내가 한심한 듯 쳐다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식사 후 잠이 들었다 일어나 나를 기다리는 친구 S의 차로 가니, 친구가 머리가 그게 뭐냐고 빗질 좀 하라고 타박을 한다. 나는 속으로 ‘이 친구가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하다가 짧게 자른 머리가 양 옆은 머리통에 딱 붙고 윗 머리는 사방으로 뻗어나간, 너무 심하게 못 난 내 모습을 룸미러로 보고 말문이 막힌다.
친구가 내려준 산길로 들어서니, 넓고 완만한 폭포가 있고, 사람들이 폭포 미끄럼을 타며 놀고 있다. 물이 깨끗하다. 나는 ‘춥지 않나? 재미있겠군.’ 하며 폭포를 지나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내 생각에 작은 대학인 듯. 아마 J가 여기서 강의를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어느 건물에 들어간다. 작은 계단식 강당 혹은 예배당 같은 공간이다. 그런데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나는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알아차린다. 바닥 물청소를 하러 온 것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바닥을 수세미로 닦는다. 위에서 흘려보내는 물이 계단식으로 설치된 의자 아래로 계속 흐른다.(2월 29일)
나이가 들었다. 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일을 그만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일을 접으니, 나와 함께 하던 이들도 차차 일을 접었다. 이제 와서 내 위치가 그들까지 염두에 두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던 것일까?
돌아보니 나는 늘 ‘도망(escape)'을 다녔다. 부모, 사회 그리고 가정으로부터... 그러한 선택이 ‘나‘를, 나아가 모두를 위한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그로 인한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남아있고 그것을 회복할 기회는 아마 없을 듯하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계속 부끄러움이 앞을 가로막을 테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용서와 화해를 꿈꾸지 않는다.
오래전 누군가 내 삶의 keyword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Growth'라고 대답했다. 아, 진짜 쪽팔리다. 이제야 진실된 키워드를 찾은 듯하고, 이것으로 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