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mi Aug 17. 2024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글항아리, 2023. 주해연 역.

   

이 책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12년에 걸쳐 쓴 저자의 심리치료 기록 혹은 추도사이며, 전쟁과 가난 그리고 폭력이 훑고 간 자리에 남은 상처를 보듬은 회고록이다.      


한국전쟁 후 미군 기지촌에서 일했던 엄마에 관한 책을 탈고하며 저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를 먹여준 모든 어머니께, 그리고 목소리를 내도 들어주는 사람 없었던 모든 이에게 이 책을 바친다.’라고 하였고, 이는 실제 목소리를 내도 들어주는 사람 없었던 이들 중 하나인 내 엄마를 위한 헌사로 다가온다. 군자씨의 ‘아이구 답답으라...’는, 내 엄마와 나의 ‘아이구 답답해.’로 이어진다.      


1960년대 미군기지 여성으로 생활했고, 거기서 만난 22살이 많은 미국 선원과 결혼해서 미국 서북부의 작은 마을로 이주한 군자씨. 아름답고 카리스마 넘쳤던 군자씨의 삶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며 성장한 저자는, 남편의 고향 농촌 마을에서 인정받기 위해 지치지 않고 투쟁을 벌였던 군자씨를 사회적 죽음으로 내몬 일련의 일들이 개인의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군자씨가 한국을 떠난 것은 실제로는 쫓겨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엄마는 올케가 가져다 둔 분유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전쟁 같은 맛이야.”' (중략) ‘양키가 우리를 구하러 왔다는 말을 들었어요. 쌀이나 보리를 기다리던 차에, 분유만 끝없이 쏟아졌고, 그걸 타서 마시는 사람마다 며칠씩 설사로 고생을 했어요.’(미국의 식량원조를 회상하는 어느 전쟁 신부의 말) (본문 p39-40)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군자씨가 겪어야 했던 전쟁 같은 맛 군자씨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밝힌다.


군자씨는 약물치료를 받으며 2번의 자살시도를 한다. “대체 왜, 엄마? 왜 그랬어요?” “내가 쓸모없게 느껴져서 그래.”(본문 p313) 나는 무엇이 엄마를 쓸모없다고 느끼게 했는지, (중략) 사람이 아닌 사물 취급을 받으며, 엄마는 당신 삶이 쓸모없다는 메시지에 둘러싸여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건 주변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미국 사회가 심지어 당신의 가족이 보낸 메시지였다.(본문 p333)


저자는 군자씨 인생에서 영감을 받아 사회학 박사학위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계획서의 첫 문장을 “본논문은 흔히 ‘Yankee whore(양갈보)’라고 번역되는 ‘양공주’라는 표상을 한인 디아스포라에 출몰하는 유령으로 분석하고자 한다.”로 시작한다.(본문 p412-413). 박사논문심사를 마친 후, 저자는 군자씨에게 논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 내가 글쓰기를 통해 그(양공주) 의미를 바꾸려고 해요.(중략) 그 여자, 나한테는 영웅이니까."(본문 p435)

 

저자는 거대한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이 양산한 폭력으로부터 사회적 사망선고를 받은 군자씨를 위해 요리를 하며, 가물거리는 빛을 찾고자 한다. 생태찌개 - “와! 너무 맛있어! 나 어렸을 때는 왜 이 요리 안 했어요?” “전에는 먹고 싶단 생각이 안 들었나 봐.” (중략) 지금 엄마의 갈망을 부추긴 건 무엇이었을까? “난 이거 만들어본 적 없어.” (중략) 평생 동안 엄마에게 생태찌개는 당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준 음식이었고, 그렇기에 가장 위로가 되는 음식이었다. (본문 p425)       


군자씨의 죽음 이후 이 책을 쓰기 시작했고 12년이 걸렸지만, 이 책엔 그보다 더 오래된 목소리와 향기 그리고 맛이 담겨있다. 이 책을 읽은 후, 늦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말을 걸곤 한다. 엄마, 엄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엄마 일본말도 잘하니, 나랑 일본 여행 가요. 참 엄만 춤도 잘 추지요? 우리 나이트클럽 가서 밤 새 놀다 올까요? 엄마의 답을 듣진 못하지만, 나는 오늘도 엄마 생전에 했어야 했던 말들을 바다에 건넨다.


작가의 이전글 허송세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