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밀러, 이봄, 2024. 이은선 역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키르케에 대한 오해와 진실
키르케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페르세의 딸이다. 이 책은 키르케가 화자가 되어 그녀와 연관된 사건, 신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키르케는 스스로 마법력을 실토한 후, 제우스에 의해 아이아이에 섬으로 유배된다. 그리고 이렇게 읊조린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올 일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 두려운 사실이었지만 공포로 얼룩진 긴 밤을 보내고 났더니 모든 게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가장 못난 겁쟁이의 면모가 진땀과 함께 날아갔다. 아찔한 번뜩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새장에서 사육당하는 새는 되지 않을 거야, 흐리멍덩해서 문이 활짝 열렸는데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처럼은 살지 말아야지.’(본문 p108)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는 키르케를 만나러 가는 오디세우스에게 헤르메스가 나타나 키르케의 음모와 흉계를 말하며, 대응방법을 알려준다.(호메로스, 오디세이아, 2020, 도서출판 숲, 천병희 역) 여기서 오디세우스와 키르케는 오직 동침하는 만남만이 있으며, 이는 모든 영웅의 험난한 여정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침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키르케와 오디세우스가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찾아가는 만남이 그려진다. 그렇게 그들은 1년을 키르케의 아이아이에 섬에서 보낸 후 오디세우스는 고향인 이타카를 향해 출발하고, 키르케의 몸에는 인간의 씨가 자리 잡는다.
키르케는 텔레고노스(오디세우스가 키르케로부터 멀리 떠나고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를 혼자 낳아 키우며, 호시탐탐 아이를 해치려는 아테나로 인해 아이아이에 섬을 마법의 덮개로 씌운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덧 텔레고노스가 16살이 되던 해, 그는 그동안 어머니 키르케에게 들은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찾아 이타카로 배를 띄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아들이 그리던 영웅이기보단, 질투, 두려움, 분노로 가득 찬 인간이었고 이를 두고 이타카에서 페넬로페와 낳은 첫째 아들인 텔레마코스(멀리 떨어져 있는 싸움꾼)는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는 여름 폭풍 또는 흐릿한 하늘을 환하게 가르는 번개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면 다른 모든 게 빛을 잃었죠.”(본문 p396) “전쟁에 대해서 뭐라고 자랑하시건 상관없지만, 아버지가 고향으로 들고 온 건 죽음뿐이라고. 아버지의 손은 두 번 다시 깨끗해지지 않을 테고, 제 손 역시 마찬가지라고. 저는 그것을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고. 이로써 모든 게 끝장났죠.” (본문 p397)
결국 예언은 이루어져,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아들 텔레고노스와의 첫 만남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동안 끊임없이 오디세우스에게 전쟁과 분노를 부추겼던 아테나는 이렇게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본문 p459)
키르케는 인간으로서는 몇 세대가 지난 후 ‘나는 우리의 만남을 주제로 만들어진 노래를 들을 것이다.(중략) 내가 어떤 식으로 그려졌는지를 접하고는 놀라지는 않았다. 오만하게 굴다 영웅의 칼 앞에 무릎 꿇고 자비를 구하는 마녀. 기가 꺾인 여자들이야 말로 시인들의 가장 주된 소재인 모양이다. 우리들이 바닥을 기며 흐느껴 울지 않으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는 걸까.’(본문 p265-266)라며 호메로스를 겨눈다.
이 책은 수려한 문장이나 휘몰아치는 박진감보다는 여신에서 마녀로, 마녀에서 인간으로 가는 여정을 키르케의 고집스러운 삶을 통해 덤덤히 보여준다. 여신, 마녀 그리고 인간 여성의 삶이 남성중심적인 단편적 이야기(아무리 호메로스라도)로 가둘 수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