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업
한명석, 2025, 도서출판 사우.
나로 말하면 孝子보다는 不孝子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思母曲풍의 글은 되도록 멀리한다. 비교당하는 孝가 불편하기도 하고, 부모-자식의 연을 부모도 아니고 나이 든 자식이 끈덕지게 쥐고 있는 점이 내 정서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옳고 그름을 벗어난, 온전히 내 개인의 취향이다. 전래동화 중 「아기 돼지 삼 형제」를 좋아하는 것도 이 취향과 연결될 것이다. 돼지가 成體가 되는 시간이 아무리 짧다고 해도, 제목에서조차 ‘아기 돼지’라고 한 것을 보면, 미성숙한 시점에서 양육자인 엄마와 분리되어 모험을 겪으며 성장하는 돼지형제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첫 장면 이후 어디에도 ‘엄마’는 없다. 그렇게 아기 돼지들은 어른이 된다.
한명석 님의 「엄마에게 가는 길」을 제주 탐라도서관 희망도서바로대출 신청을 하여 가져왔지만, 며칠 째 펼치지 않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한명석 님은 한라산이 토해낸 현무암처럼, 밀도가 높은 단단한 글을 쓰는 작가인데, 혹여 이번 작품이 연민과 회한의 思母曲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편견을 접고 작가의 신간 「엄마에게 가는 길」을 들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글을 쓰며 텃밭을 돌보는 작가는 지난 2024년 12월 90세 ‘엄마’를 영영 떠나보냈고, 2025년 7월 '경기도 고양군 백석리 알미마을에서 태어난 나물 잘 뜯던 내 어머니 이순희 님에게'라는 헌사로 시작하는 책 「엄마에게 가는 길」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작가는 그동안 엄마에게 갔던 길을 회상하며, 그 길을 후회막심한 통곡의 길이 아닌 다양한 꽃길로 만들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말을 들어드리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가끔 귀 기울여 들어드리면 엄마는 신이 나서 한 말씀을 하고 또 하셨다. (p137)
“힘들지 않으세요? 좀 참았다 가지.”
“근데 화장실에서만 나오면 또 마려워."
"그럼 가세요. "
"가고 있잖아. "
그때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완벽한 대화였다. (p141)
저자는 요양원에 계신 엄마에게 가는 길을 소소한 여행 혹은 이벤트로 장식한다.
호흡곤란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엄마를 12일간 간병하는 시간을, '입원한 엄마와 연예를 시작하다.'로 이야기하며, 그 기간을 조금 더 늘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p21-31)
꽃이 아니면 무엇으로 애틋함과 죄송함과 먹먹함이 뒤엉킨 심정을 전달하랴. (중략) 엄마의 인생 나쁘지 않았어요. 이렇게 말하는 심경으로 나는 장미와 영산홍, 모란과 백합, 으아리와 글라디올러스, 국화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곤 했다.(p60) - 작가의 집에도 가곤 했던 나는 그녀가 온갖 식물군이 어우러진 자그마한 텃밭에서 위의 꽃들을 엮는 모습을 그릴 수 있다.
다시 요양원으로 가신 엄마와의 시간을 벌기 위해 '요양원 옆 모텔에서 열흘 살기'를 한다. 이때 저자는 일산에 있는 요양원 주변 공원, 책방 그리고 맛집을 다니며 이 시간을 즐긴다. (p 47-57)
엄마를 위한 친구들의 색소폰연주(p90), 손녀의 재롱잔치(p73)를 마련한다.
저자의 엄마는 90세 생신을 3주 앞두고 돌아가셨고, 저자는 엄마가 가는 길에 함께 한 시간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업'(p196)을 받은 귀한 시간으로 삼는다.
작가가 효자였다면, 나는 아마 이 책을 다 읽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저자는 보통의 우리와 비슷한 자식처지이다. 차이라면 당사자를 외면한 채 체계적, 합리적 인양 돌아가는 요양시스템에서 당사자인 엄마의 말을 들어드리고, 깊게 숨죽인 반응의 순간을 알아차린 것.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승을 떠나 먼 길 가는 '엄마'보다 더 중요한 일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쇠락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점점 기능화되어가는 시대에, 엄마의 마음에 귀 기울인 작가의 신간 「엄마에게 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수업'을 통해 얻은 지혜를 나누는 36.5℃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