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시간을 보듬어 마침내, 내가 되다.
루스 쇼, 그림나무, 2022/2025. 신정은 역.
이 책은 현재 뉴질랜드 남섬, 인구 250여 명의 작은 마을 마나포우리에서 ‘자그마한 책방 둘’(책을 쓰는 도중 책방 셋이 되었다. 남성용 책방 '스너그' -아늑한, 포근한이란 뜻을 가진 단어-가 을 문을 열었다.)을 운영하는 저자가 자신의 삶과 책방의 에피소드를 엮은 책이다.
'자그마한 책방 둘’은 동네 마실방처럼 사람들이 드나들고, 어린이 책방엔 인형을 함께 빌려주기도 한다. 작가가 책방에 온 사람들에게 책을 골라 주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어떤 책을 찾으시지요? 아, 이 책이 어떨까요? 혹은 책방엔 없지만, 제 책장에는 있답니다. 잠깐 기다리세요. 양품점, 미용실 같은 책방이라니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나는 사람마다 맞는 책이 있다고 확신해요. 그 완벽한 책을 1000권이 채 되지 않는 나의 이 작은 책방에서 얼마나 자주 찾아내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이에요.” (p90)
1946년에 태어나 2022년에 이 책을 썼으니, 작가의 나이 76살.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작가에게 삶이란, 망망대해에 띄우는 작은 중고 요트가 아닐까? 갖은 파도를 겪고 나서도 다시 바다에 오르는 작가는 ‘인생은 카드 게임 같은 거야’라며 우리에게 등을 떠민다. 가세요. 그리고 경험하세요. 그게 삶이에요.
이 책은 시기별로 작가의 삶을 이야기하고 책방 이야기를 하는 ‘퐁당퐁당’ 배열을 한다. 비탄에 젖은 생의 한 챕터를 이야기한 후, 책방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읽게 되면 먹먹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는 휴게시간을 갖는 듯하다. 산만하기보다는 오히려 머리가 지끈거리는 수업시간 후 울리는 종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복도로 달려가서 머리를 식히고 다시 자리에 앉곤 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작가와 함께 독자도 꺾인 무릎을 추수를 시간과 공간을 갖는 책이다.
5. 1963년 : 열일곱 번째 생일이 일주일 지난 그해(1963년) 7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중략) 워런이 내 속옷을 찢고 내 몸 위에 올라타서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내 아들은 1964년 4월 10일에 태어났다. 6. 해군으로 떠나다. (p50-68) 그렇게 떠난 작가는 돌고 돌아 뉴질랜드 남섬에서도 제일 끝 마을, 마나포우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번째 <책방 이야기> : 초록색 책만 주세요. '어느 날 중년 여성이 책방에 들어와 인사도 없이 책장에서 책등이 초록색인 책들을 빼 모으기 시작했어요. 뭔가 이상했어요. “새집으로 이사해서 서재를 색깔에 맞춰 꾸미고 싶거든요.” (중략) “아니요. 안 팔 거예요.” 색깔로 맞춰 꾸미는 서재라고? 내 책으론 어림도 없지!' (p69-70)
열일곱에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아기 얼굴도 못 보고 아이를 입양 보낸 후 도망치듯 떠나는 삶의 여정이 시작되는 글 뒤에 책방의 에피소드를 넣음으로 비극과 희극의 중간쯤 언저리 공간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마치 무너진 하늘 어딘가에 있는 구멍으로 가려면 퐁당퐁당 돌을 던져, 냇물을 퍼지게 하면 된다는 듯이 말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작가의 인생 이야기는 그것이 사랑 혹은 분노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보듬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 불현듯 느낀 섬광 같은 진리가 아닌, 시간을 돌고 돌아 받아들이게 된 ‘나’라는 존재가 마치 여러 시공간들의 오케스트라 연주 같다고 할까? 고급 세단에 휘발유를 가득 채우고 운전 미숙으로 급발진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즈음, 이 책은 작가의 시공간과 함께 한 오래된 요트에 스민 年輪이 느껴지는 책이다. 우연히 만난 책에서 맞이한 충분함으로, 이 여름이 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