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서 가장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관객들의 호응도 얻은 영화라면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을 꼽는 분이 많습니다. 이 영화의 시그니처 장면이자 영화포스터로도 사용된 장면은 단연 일라이어스 병장이 베트콩군에게 살해당하면서 두 팔을 올리는 장면입니다. 그 살해의 계기는 아군인 반즈 하사가 팀킬(내부총질)을 하면서부터입니다. ‘플래툰’이 위대한 작품이라 꼽히는 것은 헐리우드영화 문법에서 미군은 선이고, 적군은 악이라는 부당한 전제를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내에서조차 ‘더러운 전쟁(Dirty War)’라는 낙인이 찍힌 베트남 전쟁에 대한 솔직한 반성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무수히 많은 신조어가 발생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프래깅입니다. 나무위키는 프래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주에는 ‘파편 수류탄의 영문명이 Fragmentation Grenade로 여기서 앞글자를 따오고 -ing를 붙여 명사화했다. 동사로 활용할때는 Frag라고 쓰며 타동사이다.’라고 부가설명을 합니다. 아무튼 프래깅, 팀킬 또는 내부총질이든 아군 내부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그 배경입니다. 영화 ‘고지전’에서는 프래깅이 플롯의 주요한 축의 하나입니다.
영어 표현인 프래깅(Fragging)이 상관 살해라는 의미로 자주 쓰이지만, 사실 사전적 의미로 따져보면 프래깅의 의미는 '아군 살해'로 상관만이 아닌 동료나 부하 등 아무나 죽이면 프래깅으로 포함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여담으로 프래깅의 어원은 미군이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꼴사나운 언행이나 보여주는 상관을 죽이려고 파편 수류탄을 던졌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나무위키’ 중에서-
‘고지전’에서 프래깅을 당하는 인물은 신임 중대장 유재호 대위(조진웅 분)입니다. 다음 장면에서 유재호의 황당한 발상을 드러냅니다. 영하 20도 내외의 혹한이 몰아치는 전방에서 싸우는 병사가 추워서 인민군복을 껴입었다면 동상의 위험이나 혹한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한 지휘관임에도 ‘군인정신’을 강조하는 장면은 그가 군인정신을 빌미로 출세욕에 불타올라서 부하를 희생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실제로도 그는 배경이 된 ‘애록고지’가 적군과 아군에 의하여 무수히 탈환과 상실을 반복하는 상황을 인지하고도 고지에 대공포를 설치하는 황당한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아군 손에 있는 대공포는 든든한 자산이지만, 적군에 노획된 대공포는 아군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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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유재호 대위는 전술상 후퇴가 필수적인 상황을, 즉 중대원들을 몰살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을 그대로 묵살하고 진지를 사수하라는 무모한 명령을 내리자 부하인 김수혁 중위(고수 분)로부터 프래깅을 당합니다. 그 이전에는 지휘관들의 무식함과 무모함이 이어져서 관객은 프래깅을 오히려 갈망하게 영화는 이끕니다. 유재호 대위가 살해당했을 때는 오히려 관객은 김수혁 중위 편을 들면서 그를 응원하게 됩니다. 실은 김수혁 중위야말로 부하를 아끼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군인입니다. 적군과 내통한다는 범죄가 실은 부하장병이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서신을 전달하는 인도주의라는 역설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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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법에 충실하려는 김수혁 중위의 친구이자 방첩대(당시 명칭은 ‘특무대’) 장교인 강은표 중위(신하균 분)는 군법을 위반한 김수혁의 프래깅 문제로 그에게 권총까지 겨누면서 격렬한 언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언쟁은 매복해있던 인민군의 특등사수 2초(차태경, 김옥빈 분)에게 저격당하는 계기를 만듭니다. 프래깅이 범죄이지만, 그는 부하를 위한 특단의 영웅적 조치였으며, 2초에게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홀로 미끼가 되어 2초와 결전을 합니다. 막상 전우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문제의 2초가 미모의 인민군 차태경인 것을 알고는 저격을 주저하는 바람에 김수혁 중위는 역저격당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프래깅이 범죄이지만, 전우애의 발현이자 희생, 그리고 우정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형상화합니다.
전체적으로 군인정신이 투철한 것은 실은 이기적인 출세욕일 수도 있고, 그 이기적인 출세욕의 응징은 외형상 프래깅이라는 범죄이지만, 그 실질은 전우애이자 희생이라는 역설을 ‘고지전’은 전편에서 일관되게 그리고 있습니다. ‘고지전’의 미학은 나시찬의 ‘전우’와 같이 일방적인 흑백논리가 아니라 전쟁 자체의 모순과 비극을 형상화한 점에 있습니다. 고교 교과서에서도 실린 고 황순원 작가의 ‘학’에서는 전쟁의 적대감보다는 우정이 소중하다는 역설을 그리고 있는데, 문득 ‘학’이 오버랩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