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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 Jun 09. 2021

사랑에 대한 고찰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개념은 어디까지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도 있고,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단순한 사랑도, 복잡한 사랑도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떤 정의를 내리기에는 얕으면서 깊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철없던 시절에는 그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들을 사랑이라 생각했었다. 살아오는 동안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진 않았지만 관계들을 맺어가면서 깨달은 것은 사랑은 결코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지금 닥쳐있는 상황에서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이루어진 현실에서 나는 다정할 수 있을까?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들이 생기면 경계하고 적대시하고 불안해하는 사회 속에서 그 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얼마나 가혹한가.


나는 사랑이 모든 감정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기쁨, 슬픔, 아픔, 희망, 고통, 즐거움, 행복, 미움, 원망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감정이라 여긴다. 사랑하기에 행복했고, 사랑하기에 죽도록 미워하는 순간들이 있듯이 말이다. 가령, 부모님께 고맙다가도 원망스러워지고, 친구와 놀 때는 즐겁다가도 싸우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들인데 가끔 사랑에 대해 무심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에 고통에 무관심하고, 다른 사람의 괴로움에 공감하지 못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도 죄의식을 갖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사랑이란 의미가 점점 좁아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랑을 무엇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자신이 정의하는 사랑의 개념이 곧 자신을 사랑하는 척도를 나타낼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나라는 존재가 소중하다면 다른 사람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고 존중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이 겪는 고통을 남이 똑같이 겪었을 때 공감할 것이고, 선뜻 도움을 주기 어려울 수 있으나 적어도 그 고통에 가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정의 내리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방관으로 치부하며 무지한 악의 평범성을 저지르곤 있지 않은지, 돌아보고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사람은 사랑이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들인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 연인, 반려동물 등등.

살면서 마음을 나누고 정을 주며 미우나 고우나 선물 같은 시간을 함께 보낸 소중한 이들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 진정한 의미를 찾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인지하고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다는 생명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이 없다면 사람은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과 도구가 될 것이다. 누군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지인이 힘든 일을 겪고, 가족이 죽는다고 해도 서로 위로하지 않을 것이며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사랑이 없는 세계를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러한 세계를 상상해 보았을 때 떠오르는 생각은 끔찍함과 사랑의 부재로 인한 모든 감정의 상실이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 도와주고 싶은 마음, 같이 아파할 수 있는 마음 등등. 그 모든 감정들이 상실되어 감정의 이름이 사라질 것이고, 애초에 감정이란 것이 없었던 것처럼 감정이란 단어도 소멸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사랑이라 말하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사랑이 상실되는 날이 어디 지점까지 와 있을까?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사랑이란 어디에나 존재해 왔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흔한 감정이다. 무관심으로 대할지, 무지함으로 대할지, 포용할지는 나의 선택이겠지. 나는 내가 포용과 이해를 선택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 선택이 한 사람의 인생을 구원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고루한 사고방식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우리라는 단어에 묶여있는 서로들이 내일을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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