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
최진영 작가의 해가지는 곳으로는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은 뒤, 모든 질서가 무너진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펜을 잡던 손에는 칼과 총이 쥐어지고, 스쳐 지나던 사람은 이제 경계해야 할 대상이자 죽여야 할 대상이 된다. 범죄는 더 이상 범죄가 아니고, 생존만이 유일한 규칙이 된 세계다.
주인공은 도리와 지나. 도리는 부모를 잃고 어린 동생 미소를 지킨다. 미쳐버린 세상 속, 아이의 간이 바이러스 치료에 좋다는 유언비어가 떠도는 만큼 그는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다. 지나는 아버지와 친척들과 함께 탑차를 타고 이동하며 생존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마주쳤고 경계와 두려움 속에서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과 폭력성은 끝없이 드러난다. 도리의 잘못이 아님에도, 지나의 친척은 그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심지어 성폭력까지 시도한다. 그 장면에서 나는 소설 속 세계와 지금의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탓하며, 손가락질하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킨다. 선의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대. 왜냐하면 그 선의가 때로는 악의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존재했다. 도리는 지나에게 구해온 립스틱을 건넸고, 지나는 그 립스틱을 매일 발랐다. 생존에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러나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것들. 지나는 도리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책을 보게 했다.
사랑은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사람답게 만들었다.
이 책을 읽고 오래 생각했다.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사랑한다. 사랑은 희망이지만 동시에 절망이기도 하다.
희망은 붙잡고 싶은데, 그 희망이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슬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희망을 말하게 하고, 절망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게 한다. 양심을 버리지 않게 한다. 나 역시 무언가를 계속 사랑하고 싶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한여름 매미 울음, 가만히 서 있는 나무들,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나 자신을. 삶의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애써 찾으려 고뇌하기보다 그저 무언가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결국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