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샤이(Shy) 중년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by 투빈대디



집 밖으로 나서면 나는 어김없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라디오를 듣는다. 오늘도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던 중 진행자의 한마디가 내 귀에 파고든다.


'샤이 중년'

이라는 한마디다.

부끄러움을 타는 중년에 접어든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 한마디가 나를 어떤 장면 속으로 들어서게 한다.



일단의 중년의 사람들이 한 식당에 들어서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주문을 기다리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누군가 주문을 받으러 다가올 때까지 마냥 그대로다. 식당 사람이 다가오자 조금은 작다 할 목소리로 주문을 한다. 주문이 끝나자 그들은 미소와 함께 작은 고개 인사를 주문을 받은 이에게 표한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마친 후 식당을 나설 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그 식탁에서 멀리까지 벗어나지 않도록 잘 간수한다.



평범한 장면이라고? 아니다.

내게는 특별하게 보인다. 중년들 여럿이 함께할 때 이처럼 목소리의 크기가 잘 관리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단 중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년들도 여럿이 함께하면 그들의 목소리가 테이블을 크게 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그 중년들이 만든 그 장면은 눈길을 받을만하다.


이들은 아마 '샤이 중년'에 속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작게 할 줄 아는 중년들이니 말이다.


중년들은 오랜 시간 동안 경험과 고민과 동행하면서, 세상 속 생존을 위해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새로 채우고 해서 오늘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년들은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행동 모양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그런 중년의 행동이 청년의 그것과 많이 다른 것은 이상할 게 없다.


중년에게는 이미 퇴화된 것으로 여겨지던 행동이 갑작스레 등장하면 눈이 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중년들이 행동에서 수줍음이 묻어 나오거나 행동의 크기를 애써 축소해 표현하는 것과 같은 행태는 아무래도 중년들에게서 기대하기는 어려운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그 식당에 든 중년들이 그 보기 힘든 수줍음과 축소지향을 보여준 것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수줍음을 타는 중년은 보기가 좋고,

자신을 작게 만들 줄 아는 중년은 멋이 있어 보인다.

우아한 카리스마가 그런 중년의 향기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샤이 중년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샤이 중년', 참 멋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내 고민의 현실은,

'나는 언제쯤 저런 샤이 중년에 이를 수 있을까?'

에 머물러 있다.


아직은 먼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가까이 가려하다 보면 언젠가는 가까이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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