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줄 말이 남아있는 아빠는 행복하다
경험은 잘 늙지 않는다
경험은 아직 늙지 않았다
'우리 딸 생일 축하해.
올해 생일은 네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니...'
오늘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카톡으로 보낸 한 장의 생일 축하 편지의 앞 조각이다. 오늘은 딸의 생일이다. 그리고 마침 딸은 잠시 나라밖에 나가 있다. 그래서 카톡 편지로 축하 인사를 했다.
딸은 나와 대화가 많았던 나의 친구이다. 중학시절 등굣길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회사 출근길까지 아침마다 딸을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 아침 동행은 내가 지금의 직장에 출근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 아침은 딸과 나의 대화시간이었다. 그 기간이 십 수년이 넘는 어린 중학생에서 어엿한 중견 직장인으로 성장한 짧지 않은 시간이기에, 딸과 내가 나눈 이야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둘이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 생활을 의미 있게 소화하는 것부터, 자기에게 맞는 직업과 직장을 찾아가는 것, 직장에서 제 역할을 찾아 자리하는 것, 회사 상사나 선배와 적절한 관계를 만드는 것, 업무를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것, 회사 생활과 내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 인생에서 좋은 남자를 구분하는 것 등 다루지 않은 주제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그 이야기들 속에는 내가 인생을 살면서 했던 잘못된 선택들과 그 선택이 가져다준 결과를 포함하는 솔직한 나의 고백 같은 이야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슬프고 초라한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까지 가감 없이 전해주려 애를 썼다. 진짜를 전해주고 싶어서였다.
이렇게 아침을 시작하는 차 안에서는 날마다 끊임없는 토론이 벌어졌다. 오랜 시간 동안.
그러니 딸이 아내 다음으로 내 생각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딸은 좀 특별하다.
내 생각과 경험은 고스란히 딸에게 스며들었을 것이고, 그것은 여러 형태로 딸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데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딸과의 아침 대화에서 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언젠가 딸이 내게 농담처럼 말했다.
"아빠 버전 2.0이 나예요.
바로 아빠의 업그레이드 버전."
나는 딸의 그 말이 좋았다.
그 말은 나와 딸의 성향이나 특성이 비슷하다는 뜻, 다시 말해서 딸이 나를 닮았다는 말이니, 나야 좋을 수밖에.
그리고 그 말은 나를 한 단계 높인 것이 바로 딸이라는 의미이다. 딸이 내 역량을 한 참 뛰어넘었다는 말이니 아빠인 나야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사실 내가 찬찬이 뜯어봐도 딸이 나보다 나은 것은 그것도 훨씬 나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뭐하나 나보다 못하거나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분명 한 단계 아니 두 단계 위가 맞다.
그런데 이미 나를 넘어 선 딸이지만, 지금도 딸은 내게 회사 생활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부딪치고 있는 갈등과 고민을 터놓는다. 그러면 나는 그것에다 나의 지나간 경험과 후회를 끌어들여 문제를 해석해 보고 해법을 찾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끝내 몇 마디 그럴듯한 조언을 찾아 딸에게 말한다. 그러곤 혼자서 살짝 뿌듯해진 가슴을 확인하곤 한다.
어쩌면 요즘의 나는 딸의 눈을 통해서 딸이 마주하는 상황을 통해서 요즘의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딸의 시각을 빌어 딸의 당면 과제를 조금이라도 더 편한 상태로 옮기는 방법을 찾는 게임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딸이 당면하는 어렵다고 하는 문제들이 지금의 내겐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딸에겐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는 문제들의 속내가 내겐 환하게 보인다. 내가 경험하고 고민하고 후회하며 속내를 알게 된 것들이 딸의 문제들과 겹쳐지며 그다음에 등장할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니 해답 찾기는 식은 죽 먹기다.
그래서 그럴까? 딸은 자기의 고민과 갈등을 내게 말하길 좋아한다. 마치 숙제를 내주듯이. 그리고 나는 그 숙제 풀이를 즐긴다.
딸과 나의 대화는 언제나 이렇게 게임처럼 진행된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딸이 내게 지금도 숙제가 될만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내게 문제를 말하며 나의 의견을 물어 준 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아직도 나의 경험이 딸의 고민 해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 같으니 말이다.
'경험은 잘 늙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이 경험을 젊게 잘 간수하여 딸과의 이런 대화를 오래도록 계속되게 하는 것이다.
생일 축하를 하려다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렸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딸내미, 생일 축하해.
니 얼굴만 떠올려도 아빤 행복하구나.
니가 있어 참 좋다.
사랑한다 딸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