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고 다른 한 해가 오는 때가 되면 많은 회사나 기관에서 '승진'이란 이름의 진급자 발표가 있다. 어느 시대 어떤조직 이든 비슷하게 치르는연례행사이다.
요즘 내가 출근하고 있는 기관에서도 얼마 전 그 연례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사무실에도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 축하세례를 받은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람 - 이른바 '승진누락자' - 도 있었다.
그런데 승진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 승진누락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승진할 의지가 분명하고 승진에 필요한 조건을 채운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로 승진자 명단에 들지 못할 때 비로소 그를 승진누락자라 칭한다. 승진누락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사무실에는 표면적으로는 한 사람의 승진누락자가 있었던 것 같다. 승진 조건을 갖춘 사람이야 그보다 훨씬 많았겠지만, 겉으로까지 승진 의지를 숨기지 않았던 사람만 말한다면 한 사람이 맞는 것 같다. 아무튼 그 승진누락자는 명단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꽤나 속상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승진누락이 과연 슬퍼만 할 일일까?'
승진자는 마땅히 많은 축하를 받는다.그러나 그 축하 뒤에는 질투와 시기도 함께 숨어있다.
반면에 승진누락자는 위로라는 따듯한 보상을 받는다. 그리고이번에는 승진에서 누락되었더라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언젠가 승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게 보통이다.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다.
좀 더 정확히 하면,
그는 승진누락자가 아니라,
승진을 뒤로 미룬 '승진지연자'이다.
만약 조직생활에서 승진누락 아니 승진지연을 큰 불편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삶은 달라진다. 상사눈치보기나주변에 잘 보이기 따위에애를 쓸 필요가없어진다. 더불어 다음 승진을 걱정하는 진급 스트레스도 더 이상 그의 문제가 아니다. 느긋하게 기다리며 마음을 좇아 생활하면 된다.
승진이란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고비마다 마주하는 오르막 계단과도 같다. 승진을 하려면 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런데계단을 오르더라도 그 속도를 늦추어 쉬엄쉬엄 오르면 별로 힘이 들지 않듯이,승진도그렇다. 시간을 길게 늘려 주고 중간중간에 휴식도끼어 넣으면 승진이란 계단도 별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다.
결국 승진을 늦추는 '승진지연자'를 택하면 승진은 더 이상 어려운 상대가 아닌 것이다.
승진 욕심 - 좀 더 정확히는 빠른 승진 욕심 - 을 내려놓으면 내 마음과 내 생각이 내 삶을 주도하게 된다. 흔히들 말하는 워라밸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얻게 된다. 승진이 주는 한 동안의 기쁨과 행복 대신 자기가 결정하는 일상을 얻는 것이다. 승진 욕심을 낼 것인가? 내려놓을 것인가? 는 결국, 남들이 인정하는 행복이냐? 나만 만족하는 행복이냐? 둘 중 어느 쪽에 손을 내밀 것이냐의 문제이다.
물론 승진이라는 오르막 길 걸음마저 아예 멈추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숨 가쁘게 서둘러서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목적지에는 다 도착한다. 조금 늦게 도작하거나, 더 늦어져 날까지 저물면 꼭대기 말고 그 아래 적당한 곳까지만 오르면 된다. 그래도 별반 차이가 없다. 본인만 차이를 크게 느낀다.
인생이라는 세상에는 오를만한 산이 지금 오르고 있는 이 산 말고도 수도 없이 많다. 지금 이 산이 아니더라도, 비탈이 가파르지 않은 편한 산 이든, 계곡이 깊어 여름날에 좋은 산 이든, 아니면 활엽수가 우거져 가을이면 낙엽이 좋은 산 이든, 취향에 따라 오를만한 산은 많다. 지금 오르는 산이 전부가 아니다. 인생이란 세상은 생각보다 길고 오를만한 산도 많다.
승진자 발표가 있고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사무실에서 승진지연자, 그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