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엔 이것도 특별했다
특별함이 되는 기준
크리스마스 전날 밤,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밤 파티의 파트너는 아내와 나 둘이다.
이렇게 우리 부부 둘이서만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게 된 것은 아이들이 우리 곁으로 오고 나서 처음일 것 같다.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니 그런 것 같다. 늘 딸들과 함께 - 둘 다 또는 한 명이라도 함께 - 보내던 밤이라 그런지 왠지 조금은 생소하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이브는 아내와 둘이서 맛집을 찾아 가 반주 한 잔을 곁들이는 집 밖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저녁을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아내가 여러 차례 내게 얘기했던 동네 맛집을 가기로 한 것이다. 한참을 걸어서 그 식당에 도착했다. 우리 동네라고 하기엔 조금은 먼 옆동네 시장통에 자리한 식당이었다.
식당은 시장 골목이면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한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허름한 가게였다. 유리창이 있는 출입문을 옆으로 밀며 들어서니 이른 저녁시간이었는 데도 벌써 빈자리가 몇 개 남지 않았다 - 물론 전체 식탁이라 해봐야 몇 개 되지 않지만. 조금 일찍 서두르자는 아내의 말을 듣길 잘한 것 같았다.
빈 식탁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아내가 주문을 했다. 이 식당의 대표 음식인 보쌈 중자 하나와 칼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거기에다 반주감 막걸리 한 병은 내가 시켰다.
먼저 가져다준 막걸리를 흔들어 잠시 진정시키는 사이, 불판 위에 차려진 보쌈이 그럴듯한 모양으로 식탁 한 편에 놓이고 불이 지펴진다. 이어서 숨을 쉬고 있는 듯한 빨간 배추김치가 푸짐하게 차려진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의 침샘은 자극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 보쌈과 김치는 이 집의 첫 번째 명물이라고 아내가 살짝 귀띔해 준다.
그리고 내가 입가심 감으로 좋아하는 흰 생배추에 쌈장도 식탁 한쪽에 놓인다.
좀 있으니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는 뜨근한 국물에 날렵한 면발이 살짝 보이는 이 집의 두 번째 명물인 칼국수가 등장한다. 칼국수는 그 등장만으로 우리 식탁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따뜻하고 넉넉하게 바꾸어 버린다. 분명 한 그릇을 시킨 칼국수가 두 그릇으로 만들어져 아내와 내 앞에 하나씩 놓인다. 주인장의 인심과 센스가 느껴진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른 막걸리를 들어 마개를 딴 후에 앞에 놓인 양은잔에 넉넉하게 따른다. 그리고 아내와 난 잔을 부딪친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렇게 올 크리스마스이브 만찬은 시작되었다.
집 대신 시장통 식당에서, 화려한 유리 와인잔 대신 양은 막걸리잔으로 하는 건배도 나름 괜찮다. 술과의 구색을 맞춘다며 이것저것 다채롭게 준비하던 서양 음식들보다 시뻘건 김장김치에 보쌈 한 입이 더 맛나게 보인다. 조잘대는 딸들의 수다도 좋지만 아내의 미소가 곁들인 몇 마디 말도 좋다.
이렇게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식사지만 크리스마스이브라는 특별한 날과 만나니 이미 특별한 만찬이 되어있다. 그리고 나와 마주 앉은 사람도 오늘이라 더욱 특별해 보인다. 참 묘한 일이다.
세월이 더할수록 이런 특별한 날은 차차 조금씩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날로 변해 갈 것이다. 당연한 자연의 법칙이다. 나도 알고 아내도 안다. 아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도 특별한 날인 오늘 둘이서 맛본 이 보쌈에 생김치 한 입은 앞으로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억 위에 이런 것들이 하나씩 특별한 추억이 되어 덧놓아져 갈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턴 곧 다가올 다음 특별한 날을 위해 우리 동네는 물론 앞뒤 동네 식당들도 더 유심한 눈으로 살펴봐 놓아야겠다.
그러면,
이런 날 이런 것들이 더 오래도록 특별할 수 있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