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또 다른 부캐를 찾아야 할 시간
새로운 끝이다. 길지 않았던 그러나 이전 과는 전혀 달랐던 나의 세 번째 직장생활, 나의 부캐여행이 이제 막 종착역에 도착하고 있다. 오늘 그 끝을 맺는 부캐생활 이 년은 그전 삼십 년의 본캐생활과는 많이 다른 경험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담담한 눈으로 그 시간을 채웠던 나의 부캐 모습을 뒤돌아서 본다.
그 이 년은 내게 처음 경험하는 공무원 엿보기라는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비좁은 사무실 공간에 같이 앉아 주변의 숨소리까지 들으며 공무원 그들의 직장생활을 관찰(?)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상시에는 멀리만 보이던 공무원들의 겉과 속의 본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청년들과 만나고 그들과 긴 시간 동안 함께 내일을 이야기한 요즘 청춘들에 대한 탐구의 시간이었다. 청년들의 고민과 희망을 듣고 함께 접근로를 찾았던 특별한 경험의 시간이었다. 내 딸들이 아닌 그 또래 다른 청년들과 생각과 마음을 나누었던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이 년은 나의 본캐와는 많이 다른 부캐인 나로 살아본 시간이었다. 이십 년 만에 내 위 상사가 존재하는 위치에 서 보고, 삼십여 년만에 일선담당자로서 업무를 수행해 본 시간이기도 했다. 탑 다운(top down)이 아닌 바텀 업(bottom up)의 각도로 조직과 그 구성원을 바라본 특별한 경험이었다. 새로운 경험의 시간이었다.
주어진 권한이나 권력 같은 공식적인 영향력을 티끌만큼도 갖지 않은 위치에서 일과 사람을 만난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권력약자인 부캐로 세상을 만나 본 특별한 경험 같은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다르면 같은 상황도 다른 접근이 요구된다는 그런 것 말이다. 또 하나 배우는 시간이었다.
의사결정과는 멀리 떨어진 조직생활을 즐겨본 관찰자의 생활이었다. 업무는 물론 점심식사 메뉴 한 번 선택하거나 의견을 내지 않은 수동의 행동양식으로 생활한 익숙하지 않은 경험의 시간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백팩을 멘 채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한 온전한 복장 자유를 실천해 본, 버킷리스트 실현의 시간이었다. 덕분일까? 출근 발걸음은 새털 같았고 퇴근 걸음은 봄바람 같았다. 미소와 동행한 자유의 시간이었다.
나인 투 식스(9 to 6)의 칼출근 칼퇴근을 실천하고, 근무시간 내내 사무실의 한 자리를 말뚝처럼 지키는 사무실 감옥을 체험한 고난(?)의 시간이었다. 사무실 감옥에서 보내는 나인 투 식스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체감한 구속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진 색다른 부캐여행이었지만, 그 시간이 내게 준 가장 특별한 선물은 어쩌면, '숲만 보던 내게 나무와 가지를 보게 한 것'일 지도 모른다. 땅바닥에 발을 딛고 나무 하나하나 가지 하나 잎사귀 하나를 눈에 담아 본 특별한 경험의 시간이었다.
설익은 나를 한층 더 익혀 준 성숙의 시간인 나의 부캐생활이 이제 그 막을 내렸다.
문득 엊그제 한 친구가 내게 한 말이 떠오른다.
"웰컴 백!"
"제자리로 돌아온 것 환영한다."
제자리인 백수로 컴백한 것을 축하한다는 말이었다. 백수가 우리 나이엔 제자리라고 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내일부터 난 제자리 본캐로 복귀한다.
마지막 퇴근길을 걷다 보니 많은 이들이 스쳐 지나간다. 내일이면 아름다울 추억 속 주인공이 될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모두의 행복을 빈다.
그리고
"굿바이, 나의 부캐생활."